소가야는 정말 작은 가야일까

2023. 7. 22. 17:5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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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 왕족들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고성읍 송학리에 있는 송학동고분군.

소가야(小伽倻)는 경상남도 고성군에 있었던 가야 중 하나입니다. 여섯 개의 가야 가운데 신라 유리왕 19년(42년)에 경상남도 고성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이러한 소가야는 김수로왕과 함께 구지봉에서 태어난 6명의 동자 중에서 막내인 김말로(金末露)가 건국했습니다. 
고성에 자리했던 나라는 여러 개의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소가야는 『삼국유사』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고성지방의 옛지명은 고자국 혹은 고사포국이었으며 조선시대 지리지인 『고려사』지리지는 고자국의 전신을 ‘소가야국’이라 언급했습니다. ‘소가야’란 명칭에 대해서는 그 어원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쇠가야’를 잘못 정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경덕왕은 고자군을 고성군으로 바꾸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성의 지명이 철성(鐵城)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소가야는 쇠의 가야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쇠가야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가야는 주요 교역품은 철이었을 것이며 주변의 골포국, 가락국 등과 같이 해상교역을 기반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소가야의 초대국왕인 말로왕은 금관국의 초대 왕인 수로왕과 함께 구지봉에서 나온 6동자 중 제일 막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성에서 고자국을 세우고 고성 김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기록이라고 남은 것은 수로왕을 포함한 5명의 동자 들과 함께 알에서 태어나고 고자국을 건국한 것뿐이며, 그래도 6명의 동자 중에서 수로왕과 함께 이름이 전해졌습니다. 말로왕이 도읍지인 고성에 돌성을 쌓았는데, 처음 구조는 둘레가 3,524척, 높이가 약 15척이었다고 하며, 성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고 위치에 따라 동문, 서문, 남문이라 불렀고 그 위치에 따라 비롯한 마을 이름은 동내, 서내, 남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말로왕을 시조로 삼는 고성 김씨의 소개에 따르면, 말로왕의 왕릉은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금봉산에 있다고 합니다.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지만  작은 부족사회가 삼국시대에 이르러 다른 5가야와 함께 소가야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역사학계에서 거의 정설화되어 있습니다. 

고성지역 가야고분에서 발굴된 각종 토기류.

이 소가야가 나름의 정치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건국설화 뿐만 아니라 포상팔국전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골포국, 사물국, 칠포국과 함께 함안의 아라가야를 공격했고 목적은 농경지확보를 위한 내륙진출이었을 것입니다. 함안을 공략하면 의령과 진주지역으로 진출이 가능했을 테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서 전쟁 이후의 기록을 살필 수 있으며 동학동고분군과 내산리고분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전쟁의 패배가 소가야의 몰락을 가져온 것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6세기 전반까지 그 세력을 유지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성식토기와 고분군의 분포로 그 세력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료로 보면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欽明) 5년조에는 구차(久嗟)로 적혀 있고 중국 삼국지(三國志) ‘위지 한전(魏志 韓傳)’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이라고 표기하여 동북아 3국의 역사서에 그 존재를 나타내고 있으니 분명한 것은 가야소국의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말로(末露)가 가락 건국 15년 후인 서기 57년, 지금의 고성지방에 나라를 세운 후 9대 이형왕(而衡王) 29년(서기 532)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475년간 이어져 왔으니 기록이 남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2000년 8월27일, 고성애서 채색고분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채색고분을 ‘장식고분(裝飾古墳)’이라 하여 규슈지역에서만 해도 지금까지 110여기의 무덤에서 확인된, 일본 특유의 무덤내부 장식입니다. 아마 이 분야를 심도 있게 연구한 학자라면 일본에 와있는 착각이 들 정도일 것입니다. 남아있는 부장품들은 가야는 물론 신라·백제 토기와 함께 일본의 토기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가야무덤 발굴품들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습니다. 일본열도에 보이는 채색고분이 왜 이 지역에 나타나느냐, 그리고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가야·백제·신라·일본계 토기들이 함께 묻혀 있는 이유에 대해 여러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무덤에 대해 전방후원분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어 일본학계도 주목하였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전방후원분이 아니었습니다. 이 무덤은 6세기 전반의 구덩식 돌방무덤, 굴식 돌방무덤 그리고 앞트기 돌방무덤 등 세 가지 무덤형태가 둥근 봉토분 형태로 연결되어 외형상 전방후원분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로 만들어진 구릉 안에 여러 형태의 무덤형식이 모여 있는 것은 가야지역에서는 이 고성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는 게 흥미롭습니다. 6세기 전반으로 비정되는 고분의 ‘다국적’ 출토 유물에서 보듯 고성은 주변과 나아가 일본과의 교류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공은 당시 무역업자이거나, 혹은 이러한 유물을 소유할 수 있는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요. 서기 532년에 김해지역의 금관가야와 함께 신라 법흥왕에 의해 병합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먼저 채색된 ‘굴식 돌방무덤’이므로 이 형태는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장식고분의 한 유형이라는 것을 감안, 바로 이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이 소가야 마지막 임금일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뿐만 아니라 소가야는 가야연맹체 가운데서 해상 루트를 통해 신라·백제·일본 규슈와 연결되는 교류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는데요. 결국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인 소가야 왕이 먼저 죽어 묻히고, 왕비가 채색고분인 ‘굴식 돌방무덤’에 묻힌 것이 아닐까하며 부부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채색고분에서는 남자유물인 무기류는 보이지 않고 유리 목걸이·유리 구슬 등 여성 장식품들이 주로 출토됐다”고 한 것인데요. 피장자가 여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며 왕비는 왜에서 시집온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소가야의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성 송학동 고분군

한편  ‘소가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 기록에서 5가야에 대한 설명 중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固城)”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는데요. 과연 이 명칭이 어울리는가에 대한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따라서 ‘변진고자미동국’이라는 명칭이 『삼국지』에 나오므로 그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소가야가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6세기중엽까지는 유력한 가야 세력으로 보았는데요. 고성 내산리 고분군에서는 200~300년 사이에 걸쳐 형성되는 다른 고분군과는 달리 5세기말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성되어 갑자기 세력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외래계 토기와 더불어 장신구 등 출토 유물들은 소가야-영산강- 왜 세력간의 교류 및 교섭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소가야는 신라, 백제, 일본 규슈와 연결되는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는 왜의 교역 주체가 대가야가 아니라 소가야라는 의견도 제시되었습니다. 한편 고성의 지배층들이 가야의 적대국이라 여겨지던 신라와도 교역을 했다는 점은 또다른 사실을 추측하게 했는데요. 고성으로 간 세력은 고령에서 보낸 이들로 일부가 일본으로 나갔던 왜교포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5세기 후반이후에 고성으로 간 사람들은 고령지방의 사람들에 비해 개방적이었을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가야식 토기가 있는데요. 토기양식의 분포가 꼭 정치체의 권역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고자국의 정치체가 소가야식 토기가 분포하는 산청, 합천, 하동, 진주, 사천 지역의 정치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소위 소가야식 토기(1단장방형투창굽다리접시, 입큰긴목항아리, 손잡이잔, 수평구연항아리)라고 하는 유물들이 5세기 중엽까지는 넓게 분포하다가 대가야양식이 확산하면서 위축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다만 고성지역에서 함안 양식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성과 함안 사이에 교류는 빈번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성과 고령, 그리고 소가야와 대가야 더 나아가 왜와의 교류 등을 생각하여 고성 지방 지배세력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요. 고성의 지배층이 독자적인 수장층이었다, 혹은 고성의 지배층과 정치적 신념이 달랐을 수 있다, 고성세력은 고령에 종속된 세력, 혹은 남원, 합천, 함안처럼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던 부류, 고성의 수장층 중 일부가 고령에서 보낸 왜인관료로 이해하는 견해, 혹은 임나가라와의 연관성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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