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건국설화 정견모주
2023. 7. 23. 17:5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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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건국설화에는 정견모주설화과 난생설화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난생설화는 6개의 황금알 중에서 여섯 왕자가 탄생하였고, 맨 처음 태어난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수로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전해지는 건국설화는 바로 정견모주 설화입니다.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최치원의 저술 「석이정전」에 등장하는 가야 산신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찬자가 인용한 「석이정전」 즉, 승려 이정의 전기에 등장하고 「석이정전」은 신라 때 최치원이 지었습니다. 정견모주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신라 말 최치원의 저술에서만 확인되고 있습니다.
‘본래 대가야국이 있던 곳이다.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또는 내진주지(內珍朱智))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대략 16대 520년 동안 존속하였다.’
‘ 최치원이 지은 「석이정전(釋利貞傳)」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가야 산신 정견 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응감하여,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그러나 수로왕의 고기(古記)에 나오는 여섯 알 이야기와 더불어 모두 허황된 것이어서 믿을 것이 못 된다.’
‘또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釋順應傳)」을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대가야국의 월광 태자(月光太子)는 정견 모주의 10세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이다. 이뇌왕은 신라의 영이찬(迎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에게 장가 들어 태자를 낳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세손이다.” 그러나 역시 참고할 것이 못 된다.’
정견모주 설화는 천신과 지모 신의 결합에 의해 건국시조가 등장합니다. 정견모주는 대지를 상징하는 산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천신인 이비가지와 결합으로 뇌질주일을 낳은 것은 다른 신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특이할만한 것은 천신인 이비가지보다 가야 산신 정견 모주가 먼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태자인 월광태자를 ‘정견의 10세손’이라고 칭하는 것은 수로를 중심으로 세대를 정하는 가락국 건국신화와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에서 지모 신적인 성격이 상징하는 것은 아무래도 토착 재지 세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가야의 건국 과정에서 이 지역의 재지 세력이 갖는 위상과 역할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 신화의 요소는 보이지 않는데 이는 본래 있었으나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석이정전」이라는 전기의 성격상 계보만을 간략히 소개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내용이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령 양전동 암각화가 있는 곳의 지명이 ‘알터’로 전해지고 있으며, 정견 모주가 알을 두 개 낳아 하나는 놔두고 하나는 낙동강 하류로 흘려보냈다는 민간 전승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본래 난생설화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설화에서는 대가야 이진아시왕과 금관국 수로왕을 형제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아마 가야연맹이 둘로 나누어 다스렸음을 시사합니다. 『삼국사기』 악지(樂志)에는 가야 출신 악사 우륵(于勒)이 지은 12곡(曲) 중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라는 이름이 있는데, 상⋅하 가야 연맹에 의한 분할 통치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요. 이것에 대해서는 대가야가 등장하면서 내세운 명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기가야연맹은 금관가야가 주도하고 후기가야연맹을 대가야고 주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금관가야 건국 신화에서는 단지 김수로왕 신화를 통해 금관가야국만 언급하는 데 비해, 대가야 건국 신화에서는 대가야국의 시조인 뇌질주일과 금관가야국의 시조 뇌질청예(수로왕)를 형제 관계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대가야의 건국 신화는 김수로왕 신화보다는 후일에 성립한 것으로 보이며, 일단 금관가야가 세력을 잃고 대가야가 가야 연맹체의 연맹장 지위를 차지한 5세기 이후, 즉 후기 가야 연맹 단계의 역사적 상황까지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건국설화는 가야연맹이 통합하지 못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며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서로 연맹장적 지위를 교체해 갔던 역사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렇게 형제관계로 설정하여 가야연맹의 복원 내지는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으려는 대가야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둘은 형제관계가 아니고 정치집단의 교체과정을 형제관계로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정견모주설화가 가야 당대부터 존재한 것인지, 혹은 가야 멸망 이후 유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개국신화가 문헌을 정리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견모주의 “정견‘이나 월광태자의 ’월광‘이라는 불교적 인명은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시기를 추정하게 하는데요. 정견은 불교에서 실천 수행하는 중요한 덕목인 8정도의 하나로서, 열반에 이르는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처가 깨달은 바른 견해를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월광은 석가모니가 과거 세상에서 국왕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의 이름으로 불교식 별칭입니다. 그리고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는 것은 522년, 대가야가 멸망하는 것은 562년이니 그 사이에 이 이야기가 문헌에 기록되었거나 석순응과 석이정 등이 해인사를 창건하던 9세기초에 기록된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가야‘라는 불교식 나라이름이 가아당대에는 보이지 않았고 ’가야산‘이라는 명칭도 등장한다는 점을 본다면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로왕 설화를 모티브로 하여 그 무대를 구지봉에서 가야산으로 옮겨와 건국기년은 동일하게 하고 본래의 6개의 알 대신 형제관계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러한 대가야 개국신화가 만들어질 당시 가락국계인 김유신계가 몰락한 것은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에서는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과 형제인 이진아시왕은 서기 42년쯤 고령을 중심으로 대가야국 전신인 반로국을 세운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사실 건국기년이 같다는 점은 또다른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그것은 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가락국 지배세력의 일부가 고령지역으로 흘러들어와 토착세력과 결합하였을 가능성입니다. 그러면서 대가야의 시조가 형으로 기록된 것은 토착세력이 더 강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겠느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를 가진 고령지역의 반로국은 이후 국호도 ’가라‘로 바꾸며 더욱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던 지난 2019년 대가야 지배계층 무덤이 모인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아이 무덤에서 가야 건국설화 그림을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토제방울이 나왔습니다. 문헌으로만 전하는 고대 건국설화를 시각화한 유물이 발견되기는 국내 최초였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구지봉에서 가야 시조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경남 김해를 중심지로 삼은 금관가야뿐만 아니라 대가야에서도 전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발견된 유물에 대해서 그림의 실체를 동물로 볼 수도 있고 그림과 가야 건국설화를 연결 지을 단서가 충분하지 않다는 반론도 제기될 소지도 있었습니다. 이 유물을 발굴한 조사단은 토제방울 그림이 설화에 등장하는 구지봉 혹은 산봉우리로 짐작되는 남성 성기와 거북 등껍데기, 관을 쓴 남자, 춤을 추는 여자,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 하늘에서 줄에 매달려 내려오는 자루를 표현했다고 보았습니다. 남성 성기는 가야 건국설화 속 여신 정견모주가 노닐던 고령 인근 가야산 상아덤을 표시한 것이라 보았으며 구지가 연구자 중에는 거북 머리를 수로, 우두머리, 남근, 구지봉으로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거북 등껍데기는 고리 부분을 머리로 인식해 그린 것으로 판단되며, 관을 쓴 남자는 구간(九干)에 해당하는 지도자를 형상화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에 따라 가락국기에 실린 난생(卵生) 설화는 가야 지역 건국신화에 공통으로 나오는 핵심 요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는데요. 방울을 만든 대가야 장인은 그가 살던 대가야 시조 탄생설화를 보여주고자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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