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후 가야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2023. 7. 25. 07:0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728x90

 

수로왕릉 가야를 세운 수로왕의 무덤으로서 현재 김해시내에 위치해 있다. 가야 멸망 이후 드문드문 이어지던 제사를 문무왕 때에 이르러 복구시켰다.

강원도 동해시에 북평동 추암 고분군이 있습니다. 이 유적지는 삼한시대 실직국에 속해 있었으나 신라 파사왕 23년에 신라에 편입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서 옹관묘, 수혈식 석관묘, 횡혈식 석실묘 등 다양한 무덤 형식이 확인되었는데요. 출토유물 가운데 토기류인 장경호, 단경호, 개배(뚜껑접시) 등 30여 점이 500년대 중후반의 대가야 양식으로 드러났습니다. 신라고분에서 대가야 토기가 나온 것은 특이할만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는 단순한 교류의 산물로 보지는 않습니다. 대가야인의 이주 정착에 의한 유물이 이동 또는 직접 제작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령이라든가 동해로의 루트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데요. 이는 교류의 산물이 아닌 신라의 대가야 사민정책에 따라 나타난 유물로 보고 있습니다.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였습니다. 이후 가야인들을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나라의 사람들처럼 아마 신라 각지에서 노비로 전락하여 생활하였을 텐데요. 신라의 화랑 사다함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왕이 가야인 포로 300명을 노비로 하사했지만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또 왕이 많은 땅을 부상으로 줬지만 사양하다가 거듭되는 왕의 뜻을 받아들여 알천의 불모지만 받았다고 합니다. 가야의 유민들 중에는 출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신라에 망명한 우륵, 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유명한 강수의 조상도 가야인이었습니다. 우륵은 가야지방의 12곡을 정리한 인물로, 진흥왕의 후원을 받아 신라 대악을 만들었습니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무열왕이 강수의 문장력에 감탄해 출신지를 물으니 ‘임나가량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작 가야인이라는 이유로 경주에 거주하지 못하고 중원경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중원경은 가야가 망하고 나서 그 유민들을 옮겨와 살게 한 것입니다. 
‘나라를 보전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 속에 묻히랴. 차라리 돌 속에 들어가서라도 백성을 지키겠노라’
이 말은 지리산 자락의 태왕궁에서 구형왕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로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입니다. 한편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나라가 망하려 하자 구형왕은 지리산으로 피해 들어와 천연요새인 국골에서 도성을 세우려했다고 합니다. 또 왕등재 일원에 성을 쌓고 신라에 항전했다는 전설도 내려오므로 해당 지역에 관련 지명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당시의 항전했던 가야 사람들은 위 내용처럼 신라에 패해 노비로 전락하거나 다른 곳으로 강제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신라충신죽죽비 고려시대에 건립된 비로서 합천 대야성 아래에 위치해있다. 죽죽은 대가야의 후손으로서 사후 급찬으로 추증되었다.

하지만  구형왕 자손들에게는 신라가 야박하게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구형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노종은 금관국이 만약 멸망하지 않고 대를 이었다면 구형왕에 이어 금관국의 임금이 되었을 인물입니다. 노종은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한 덕에 금관국 귀족은 신라의 진골 귀족에 편입되어 나름 권세를 누리고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까지 항전했다는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그 속에는 나라를 어쩔 수 없이 넘겨주어야 했던 금관가야의 운명을 안타깝게 여긴 지역 주민들이 끝까지 싸운 구해왕이야기를 만들어낸 건 아닌가 싶은데요. 노종은 한강 유역 탈취 때 한 사람으로  출전해 백제군을 격파했다고 합니다. 이 때 세종은 파진찬이었으며 이후 이찬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후에도 관산성 전투의 보복으로 백제군이 577년에 신라 서쪽 변경을 공격해 왔을 때 이를 요격하여 막아내었습니다. 진평왕이 즉위한 뒤 579년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10년 동안 재임하다가 588년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노종의 동생이자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막내) 아들은 김무력으로 그는 나제동맹 결렬의 보복으로 백제의 성왕이 신라에 쳐들어갔을 때는 신주 국경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전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후 왕을 잃어 혼란에 빠진 백제군을 크게 무찔러 좌평급 귀족 4명과 군사 29,600여명의 목을 베는 대승리를 거두는 등 전장에서 그의 형 노종 이상으로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김무력의 아들이자 금관가야 수로왕의 12세손이자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손자인 김서현은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 만명과 야합해 신라왕실과 관계를 맺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바로 김유신입니다.

산청 전 구형왕릉

김유신은 가야계 왕족 출신이면서 신라의 장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가야인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사실 그에 대해서 청년시절의 활약상은 알 수 있는 게 적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쩌면 그가 가아계이기 때문에 전장에서 신라의 장수로 활약하는 게 쉽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은 금관가야인의 후손으로 그 활약상이 두드러지지만 대가야인은 어땠을까요. 대가야는 마지막에 병합된만큼 신라에 대한 저항도 컸을 것입니다. 따라서 금관가야인에 비해 신라 내에서 활약상이 적었다고 생각되는데요. 가야 출신으로 신라인으로 활약한 사람은 크게 3명이 있는데 우륵, 죽죽, 그리고 강수가 있습니다. 우륵은 진작에 항복한 인물이어서그런지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데요. 죽죽과 강수는 역사에서 몇 번 이름을 비추지만 그렇게 큰 비중은 없는 편입니다.  죽죽은 대야성전투에서 활약하였는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무장입니다. 이로 인하여 나중에 신라 조정에 의해 급찬으로 추증되었습니다. 강수는 신라의 뛰어난 문장가로서 머리가 뾰족하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습니다.  강수는 나중에 실력을 인정받아 사찬의 작위를 받는데 이는 8번째로서 6두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고령 대가야의 고분군.

반면 문무왕의 어머니인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여동생입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661년 조서를 내려 수로왕을 종묘에 합하고 제사를 지내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가야 멸망 이후 수로왕에 대한 제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였으나 이로부터 정기적으로 제사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즉 신라의 왕실의 외척이 금관가야 왕실이고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유신 또한 문무왕과 친인척사이가 되었으니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차열한 정치적 투쟁에서 김유신은 가야왕실의 후손이지만 신라왕실의 후손이기도 하고 또한 신라의 장수로 활약했으니 그도 스스로를 가야인의 후손보다는 신라인으로 인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금관가야인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에 정치현장서 나름의 설움이 있지 않았을까 봅니다. 
한편 신라에서 활동한 가야인의 후손으로 심희라는 승려도 있습니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며 속세의 성은 신김씨(新金氏)이다. 그 조상은 임나(任那)의 왕족으로 성스러운 가지로 뻗어났으나 매번 이웃 군사에게 괴로움을 당하다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먼 조상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은 금오산의 기상을 이어받고 신라의 정기를 타고 올라서 문부(文符)를 잡아 재상이 되고 무략(武略)을 지녀 왕실을 도와 ... 두 적을 끝내 평정하여 우리 나라를 길이 평안케 한 사람이며, 세 왕을 극진히 받들어 멀리 진한의 풍속을 어루만졌다.’ 「봉림사 진경대사비」
내용으로 보아 심희는 김유신의 후손입니다. 855년에 태어난 심희는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자태가 드러나고 어려서도 철부지 같은 마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출가 전에는 불교에 심취해 모래를 쌓아 탑을 이루고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진경대사가 출가한 것은 아홉 살 때였습니다. 그는 전국을 다니면서 수행하였는데 당시 반신라적인 정서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민심을 살피며 돌아다닌 후 창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복림이라는 길지가 있었고 그를 지원해줄 최고 세력가 김율희, 그리고 실직적인 조력자 진례성의 김인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나왕족이던 진경대사가 김해지역과 가까운 창원에 봉림산문을 개창합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 신라 경주세력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로 볼 수 있는데요. 심희의 아버지는 관직을 얻지 못하고 도가적인 속세를 떠난 삶을 살았다고 하니 김유신의 후손이 당시 정치권에서 배제되었다는 알 수 있습니다. 가야는 멸망하고 나서도 그 이후로도 해당 지역사람들은 가야인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신라말기에는 반신라적인 정서마저 품게 된 것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