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인들 열도로 건너가다
2023. 7. 24. 07:0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728x90
함안 우거리 토기가마군은 함안군 가야읍과 법수면 일원 천제산(해발224.9m) 끝자락에 분포한 대규모 가야시대 토기 생산지입니다. 이곳에서는 토기가마 4기와 실패한 토기를 폐기하던 구덩이 2곳이 발굴되었습니다, 토기가마와 구덩이 안에서 4세기 아라가야의 다양한 토기 조각들이 수만 점이나 출토돼 1600년 전 가야인들의 가마 조업방식과 환경 등을 생생하게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야 대표 물질문화인 토기 생산·유통 과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우거리 토기가마군에서 생산된 다량의 토기들은 남강과 낙동강을 통해 영호남 여러 지역으로 유통되었는데요. 특히 일본의 대표적 스에키 생산유적인 오사카 쓰에무라 가마유적(陶邑 古窯址群)의 형성에도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가야 토기문화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스에키는 일본 고훈 시대[古墳時代, 3세기 말~8세기 초]부터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년~1185년]까지 사용된 도질토기(陶質土器)로 스에키의 기원은 한반도의 백제, 신라, 가야 토기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대략 5세기 전반부터 한반도의 생산 기술이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질토기가 스에키의 원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백제, 신라 등의 장인 집단이 일본에 건너왔다'는 기사와도 상통합니다. 한반도에서 전래된 스에키의 제작 기술은 단기간에 일본 전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사방이 바다로 막혀 있는 일본 열도에서는 외부로부터 새로운 물건과 사람·정보가 들어와야만 거대한 기술 혁신이 가능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대 한반도나 중국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해 온 사람들을 가리켜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의 '도래인(渡來人)'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 이주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지적 자극과 사회의 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의 전달자로서만이 아니라 일본의 고대국가 체제의 확립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5~6세기 가야에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은 교역을 목적으로 단기간에 왕래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 이주했습니다. 규슈를 비롯한 일본 각지의 여러 유적에서는 그러한 구체적인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후쿠오카현 니시신마치(西新町) 유적에는 3~4세기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살았던 움집이 남아 있는데 부뚜막을 갖추고 있습니다. 조리시설의 하나인 부뚜막에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벽체를 따라 온돌 같은 난방시설을 함께 설치되었습니다. 이 주변에서 한반도 계통의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부뚜막과 온돌, 한반도계 토기들은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남긴 생활 흔적입니다.
움집 안에 있는 부뚜막에서 새로 등장한 요리 도구 중 하나가 '시루'입니다. 바닥에 구멍이 뚫린 시루는 찜 요리를 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찜 요리는 일본 사람들에게 호평받았고 시루는 순식간에 일본열도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일본으로 이주한 가야인들이 당시 주거와 식생활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셈입니다. 가야 여러 지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은 토기 제작 기술이나 말을 타는 풍습, 차림새 등 여러 방면에서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가야 토기는 매우 단단해서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고 물을 부어도 스며들지 않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가야 토기 제작 기술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5세기 초부터 스에키가 생산된 것입니다. 스에키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두드림판을 이용하는 기술, 가마를 만들고 운영하는 방법 등 다양한 방면의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일본의 초기 스에키 생산에는 가야 이주민의 영향이 컸는데, 그들은 토기 제작에 직접 종사하거나 현지인을 지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에키토기의 출현에는 당시의 한반도 상황과 맞물린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400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임나정벌이 그것입니다. 4세기 말 호남지역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400년 영남지방에서 일어난 대규모 전쟁이 있었고 이를 기점으로 일본에서 스에키 토기가 처음 출현하였기 때문입니다. 369년 나주 영산강의 마지막 마한세력이 멸망하면서 4세기 말에 내려갔으며 5세기 초에도 대규모의 망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 바로 스에키토기와 같은 고고학적인 발견입니다. 스에키토기는 1200도 이상에서 구워질만큼 고도의 제작기술이 요구됩니다. 3세기말에 편찬된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서는 구야한국(김해)과 쓰시마 그리고 이키와 규슈 북부를 경유하는 고대항로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쓰시마섬과 이키섬은 한반도 문물이 가장 먼저 유입되는 장소입니다. 쓰시마섬에서는 야요이 토기와 고분시대 스에키 같은 왜 계통의 토기와 함께, 적지 않은 낙랑토기와 가야토기 등이 출토되어 당시에 활발했던 국제교류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2천 년 전의 쓰시마에서 최초의 정치체가 성립하고 경영되던 과정에 가야인의 이주나 가야국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이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대항로는 가야인들이 일본열도로 가는 통로가 되어주었을 것이며 일본에게 있어 가야는 처음으로 인식한 외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물적인적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가야시대에 그러한 교류가 활발해졌으므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야요이시대(기원전 3세기~서기3세기)에서 고분시대(4~6세기)에 이르는 일본인의 구성비율 중 무려 80%가 도래인이라고 합니다. 아마 대부분이 한반도계통일 것이며 그 중 상당수가 가야인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래인들에 대해 한일 양국 역사학계가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는데요. 일본학계는 가야인들의 일본행을 ‘귀화’, ‘도래’라고 표현하는가 한편 우리나라는 ‘이주’ 또는 ‘진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일본이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발굴조사에 따르면 가야인들의 이주도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야인들의 이주는 토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가야이주민들이 이곳에 소와 말도 전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기마문화도 전달되었습니다.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馬具)와 말 모양 하니와(埴輪·흙을 구워 만든 인형으로, 일본의 고분 주변에 세워둔 것), 벽화에 그려진 말 그림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일본 각지에 설치된 '목장' 주변에서는 한반도 계통의 토기나 마구가 다수 발견되며 말을 타는 데 필요한 안장이나 발걸이, 재갈뿐 아니라 말을 꾸미는 데 사용한 금 장식 드리개나 방울, 말갑옷과 말투구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가야 지역에서 발견된 마구들과 비슷한 것이 많다고 합니다. 이에 더해 가야가 철의 왕국이니만큼 덩이쇠같은 철소재도 일본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3왕조교체설’을 이야기하며 가야가 언급되기도 합니다. ‘3왕조 교체설’은 일본에서 2차 대전 이후 고대사 연구의 최대 학설로 일왕이 하나의 혈통으로 내려왔다는 ‘만세일계’를 뒤집고, 서로 다른 혈통의 3개 왕조가 교체했다는 주장입니다. 처음 나왔을 때는 대담한 주장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3왕조 교체설’의 근거는 712년에 편찬된 일본 『고사기』에 나오는 야마토 정권의 1~33대 일왕 중 18명은 가상 인물이며 15명만 실재했다는 것입니다. 실재한 15명의 계보를 따져보니 3개 왕조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일 야마토 정권의 역사적 실상은 제1~3차 야마토 정권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제1왕조 스진(崇神) 왕조(10~14대), 제2왕조 닌토쿠(仁德) 왕조(16~25대), 제3왕조 게이타이(繼體) 왕조(26~33대)가 그것으로 이중 문제적인 왕조는 제2왕조입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간 가야계 혹은 기마민족계가 규슈를 손에 넣은 뒤 5세기 전반에 나라, 교토, 오사카 지방을 정복해서 가와치 지방에 왕조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역사 서술에는 객관적 사실이 뒷받침되어 연구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학설에 가야라는 나라가 언급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가야인들의 일본에서의 활약상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가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국가시대 무역항 늑도 (0) | 2023.07.26 |
---|---|
멸망 후 가야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0) | 2023.07.25 |
대가야의 건국설화 정견모주 (0) | 2023.07.23 |
소가야는 정말 작은 가야일까 (0) | 2023.07.22 |
사라진 전쟁 포상팔국전쟁 (0) | 2023.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