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시대 무역항 늑도

2023. 7. 26. 20:0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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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도 유적에서 나온 약 30cm 길이의 둥근고리칼.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들어온 것은 BC 3세기의 일입니다. 아무래도 대륙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북한이 먼저 철기 문화를 수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통신과 교통이 여러모로 늦을 수밖에 없던 그 시절 한반도 남부는 BC 2세기가 되어서야 철시기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BC 194년 연나라 위만이 고조선에 들어와 위만조선을 세웠는데, 그때 왕위를 찬탈당한 고조선 준왕이 2000호 무리를 이끌고 남쪽(전북)으로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BC 108년 고조선(위만조선)의 멸망과, 낙랑군 등 한사군 설치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은 당시 한반도 남부에 철기문화를 전파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주목받는 유적지가 바로 늑도입니다. 그러한 데에는 당시 내륙 루트보다 덜 위험하고 더 수월한 바닷길의 지리적 경로와 관련이 높은데 늑도가 낙랑과 왜를 잇는 절묘한 중간지점이었다는 것입니다. 늑도는 BC 1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100~150년간 한·중·일을 잇는 ‘늑도 교역’의 본거지가 된 것입니다. 늑도가 고고학의 중요한 지점이 된 데에는 3가지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첫째 낙랑과의 교역을 증명하는 반량전 오수전의 중국 돈, 한나라 거울, 낙랑계 토기 등은 늑도가 선진 문물의 경유지였다는 것입니다. 둘째 놀랍게도 늑도에 ‘왜인 마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왜의 야요이계 토기와 야요이인 무덤이 많이 발굴됐는데 이는 늑도에 체류한 왜인 집단이 남긴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교역에 필요한 인적 자원으로 브로커 통역자 노동자 등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김해 구산동 유적에서도 마찬가지로 왜인 집단 거주가 확인되는데 이는 당시 남해안에서 드문드문 확인되는 양상입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넘어가 야요이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었던 도래인, 그 후손인 야요이인들이 수백 년 뒤 다시 조상 땅을 찾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늑도에는 늑도와 연결된 내륙에서 차출돼 이주해 온 대규모 공인 집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묘역도 따로 조성된 이들은 제철, 실뽑기, 면짜기, 골각기 작업 등 다양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제품 원료가 없는 곳에 존재한 이런 공인 집단은 내륙의 상위 집단에 의해 계획적으로 동시에 들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 가지 특징에 근거할 때, 늑도는 제철 유적을 갖춘 상공업 전문 취락, 물품 공급·교환이 진행된 항해자들의 중간 기착지, 해상 교역 주도세력의 전진 기지 등으로 볼 수 있다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최근 유적 학술 발굴조사가 진행된 늑도동 362번지 일원

그러던 지난 2023년 3월에는 늑도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삼한 시대의 온돌이 발견됐습니다. 벽면에 점판암을 양쪽으로 세운 뒤 덮개를 덮어 열기가 돌 사이 통로를 지나도록 만든 난방용 온돌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온돌입니다. 구들은 북방계 문화로써 기원전 3세기부터 한반도 북쪽에서 점차 남쪽으로 전달됐을 것이란 해석이 있으나, 1998년의 늑도 유적 조사에서 고래와 구들, 부뚜막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지금은 그러한 인식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늑도의 온돌 시설이 발견되기 전까지 남한에서 가장 빠른 시기로 알려진 온돌 유적은 기원 직후쯤으로 추정되는 미사리나 수원 유적입니다, 그와 더불어 기원전 1세 후반 무렵에만 유통됐던 일본 야요이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었으며 또한 늑도에서는 중국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니 고대국가시기에 늑도가 국제무역항이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셈입니다. 그리고 늑도에서는 30cm 길이의 둥근고리칼(환두도環頭刀)이 무덤이 아닌 주거지나 생활시설에서, 그것도 세로로 1cm 정도 꽂힌 상태로 나왔다고 합니다. 둥근고리칼은 우리나라 호서지역의 삼한시대 지배층 무덤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대개 20cm 정도인데 또한 기존의 것보다 길이가 더 길다는 점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길이 50cm에 이르는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이 이보다 더 늦은 시기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늑도 유적의 둥근고리칼이 둥근고리큰칼로 변해가는 중간 단계에 있는 것이란 해석도 나왔습니다. 
이 늑도란 곳은 어떤 곳일까. 남으로 남해 창선도, 북으로는 사천 만과 삼천포 일대, 동으로는 사량도와 고성만, 서로는 노량 인근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곳으로 취락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또한 다양한 어패류가 서식하고 식수가 매우 풍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영 ~ 여수의 항로에 남해의 먼 외곽을 돌지 않으려면 늑도 주변의 대방수도를 반드시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조건으로 사람이 살게 되고 외부인도 유입되었고 이곳에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온돌방이 있었다면  이 곳에서 중국 일본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한반도 주민까지 옹기종기 모여 추운 겨울날 몸을 녹이며 이곳에서 자신들만의 바다지식과 국제무역인으로서 저마다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를 공유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늑도가 유적지로 그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 1979년의 일입니다. 1979년 문화담당지방기자의 제보로 중요한 가능성을 감지한 이후 발굴작업을 벌여 한국 중국 일본의 기원전 2세기~기원 후 1세기대 유물 수만 점을 찾아낸 것입니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제작됐거나 영향을 받은 외래계(外來系) 유물이 출토되어 초기철기・원삼국시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교역 거점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늑도에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여기서 출토된 것에는 사람뼈도 있었습니다. 뼈의 상태로 보았을 때 독무덤에는 유아와 소아만 매장하고 움무덤에는 성인이 주로 묻혔습니다. 그리고 한 집터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신장은 156.6cm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이 늑도 발굴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늑도는 고대 삼한시대에 변한 혹은 진한이었을 텐데요. 발견된 인골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인골에서는 치아를 일부러 뺀 발치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도 유적에서 출토된 사슴 뼈와 개 뼈

이러한 늑도는 언제 왜 형성되었을까 학자들이 추정하였는데요. 한 학자는 늑도는 남해안 항로상의 교통요지에 위치하여 변한과 진한의 철을 구입하거나 낙랑과의 무역을 위해 오가는 제 항해세력이 체제하는 허브항이자 제의장소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주거지 위쪽인 큰섬산 중턱 패총에서 복골, 미니어처 토기, 동물 또는 배 모양 토제품, 골검이나 토제 검파두식 모형품 등이 발견된 것에 미뤄 늑도에 일정기간 체류하면서 해신에 대한 제사를 통해 무사항해를 기원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한편 늑도의 주거지에 대해서는 상공업적 성격이 강한 취락이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미 왜와의 관계를 통해 대외교섭력이 축적되고 있었는데,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교역망이 확대됨에 따라 기원전 1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므로 이 때 늑도 유적지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농업기반이 취약하므로 육지의 다른 모(某)집단으로부터 컨트롤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다른 학자는 낙랑군(기원전 108년~기원후 313년) 설치 이후 철기문화가 보급되고 국제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늑도가 성장했다는 주장에 반기를 들기도 했습니다. 진변한 지역에서의 철기 생산 시기가 낙랑군 설치보다 앞선다면서 그 주체세력은 고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며 늑도 유물 중 일부 철기와 토기는 기원전 3~2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것입니다. 
늑도 유적에서는 총 5000여 점에 달하는 사슴, 노루, 멧돼지, 소, 말, 여우, 너구리, 오소리 등의 육상포유류와 고래, 수달, 강치 등 해양포유류가 확인되었는데 사슴은 전체 육상포유류 동물 중 83.5%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입니다. 늑도처럼 작은 섬에 많은 사슴들이 서식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슴의 견갑골은 점을 치는데 사용되니 늑골유적에서 발견되는 사슴들은 외부에서 반입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28개체의 개뼈가 발견되었는데 식용으로 사용된 뒤 버려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덤에서 주로 발견됐다는 점은 당시 개가 반려동물로 여겨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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