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왜 멸망하게 되었을까
2023. 7. 28. 20:1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728x90
가야는 왜 멸망하게 되었을까.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으니 당시 신라를 살펴보아야 하는데요. 신라는 진한의 여러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을 핵심세력으로 통합해간 나라입니다. 그리고 나물마립간 때 그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요. 신라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중엽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에 종속된 관계로 이해되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내부적인 정비를 하고 고대국가로 더 성장하게 됩니다. 눌지마립간 때에는 백제와 동맹을 통해 고구려와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신라가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증왕 대에는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마립간이라는 호칭도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신라는 내부적인 성장과 더불어 외부로의 팽창을 도모하였습니다. 지증왕 13년에는 지금의 강릉 부근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이나 그 상대는 고구려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를 대신한 가야로의 진출은 대외팽창을 노리던 신라에게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법흥왕 대에는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이전시기에 비해 더욱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습니다. 불교공인과 더불어 상대등을 설치하고 첫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였는데요. 그러면서 낙동강유역으로 진출을 꾀합니다. 당시 가야는 이러한 팽창을 하는 신라에 대해 국제결혼을 추진합니다.
‘9년 봄 2월 가양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청혼하였다. 법흥왕이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을 보내었다.’ 『삼국사기』
사료에 나온 가야가 어떤 가야인지는 모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대가야로 생각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대가야왕은 이뇌왕이고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이 아니라 딸이라고 하며 이후에 두 사람사이에 월광태자가 태어납니다. 사실 이러한 가야의 친신라정책에는 나름의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백제가 6세기초 섬진강 방면으로 진출해 오고 있었고 주요 거점은 다사진을 놀고 격돌하다가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사건이 가야가 백제에게서 신라로 돌아선 결정적인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신라와의 혼인동맹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의관문제로 가야와 신라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당시 대가야 이뇌왕이 결혼동맹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신라인 시종 100인을 각 지방에 분산배치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신라 법흥왕이 비밀리에 이들에게 신라의 의관을 입으라고 지시, 신라의 위엄을 과시해 외교적인 분란을 일으키면서 파탄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가야는 낙동강은 물론 섬진강을 끼고 있어 내륙으로 진입하는 수상교통이 발달했고, 왜와의 교역창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른바 ‘금관가야’는 예로부터 철의 생산지였으며 동아시아 철 공급의 젖줄이었는데요. 신라는 가야와 혼인동맹을 맺은 것은 가야통합의 계기로 보고 선뜻 받아들인 것이었고 의관문제는 신라가 가야를 치기 위한 명분이었습니다. 한편 가야는 백제와 신라 틈바구니에 있으면서 때로는 친백제정책, 때로는 친신라정책을 내세우는 방법으로 국가를 유지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나라를 계속 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29년에 신라의 이사부가 3천의 군사를 이끌고 4촌(금관, 배벌, 안다, 위타)를 초략하였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금관가야가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로 신라에 병합되지는 않았지만 친신라정책을 써서 명맥만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19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 장자 노종, 중자 무덕, 막내 무력과 함께 나라의 금고 보물을 갖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예로서 대우하고 상등의 지위를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도록 하였다. 아들 무력은 사환하여 각간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법흥왕 19년인 532년 금관가야왕 김구해는 왕비와 세 아들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합니다. 아마 그전에 법흥왕과 금관가야 구해왕 간에 이미 협의가 이루어진 건 아닌가 싶은데요.
‘11년(524년) 가을 9월 왕이 왕경을 나와 남쪽 국경을 순수하면서 영역을 넓혀가자 가야왕이 와서 만났다.’ 『삼국사기』 「법흥왕조」
이 기록에 나온 왕이 대가야왕인지 금관가야 왕인지 알 수 없습니다. 위치상으로는 금관가야왕이 맞지만 당시 대가야와 신라가 혼인동맹을 맺고 있었으니 신라왕이 순시하자 이를 대가야왕이 만나러 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 금관가야왕이 법흥왕을 만나고 그 자리에서 금관가야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였다면 당시의 성과로 금관가야가 532년에 신라에 자진투항이 가능할 것입니다.
‘21년(527년) 여름 6월 임진 삭 갑오에 근강모야신이 무리 6만을 거느리고 임나로 가서 신라에게 격파당한 남가라, 록기탄을 부흥시켜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일본서기』
이 때 남가라는 금관가야인데 527년 이미 록기탄과 함께 멸망당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럼 금관가야는 정확히 언제 멸망당한 것일까. 고대국가의 일인만큼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 527년에 금관가야가 망했다면 532년에 금관가야가 멸망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무엇일까요. 아마 529년 3월 신라장군이사부는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다라원(지금의 부산 다대포로 추정)에 주둔한 것은 아마 백제와 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따라서 532년은 최종병합한 형식적인 날짜로 어느 정도 대항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자진투항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고고학자들은 400년대 초반 금관가야가 사실상 소멸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한편 대가야는 신라와의 혼인동맹이 파기되었습니다. 신라는 이를 계기로 탁순국을 쳐서 세 개의 성을 함락시킵니다. 그리고 이후 탁기탄국을 무너뜨렸으며 법흥왕은 가야에 대해 더욱 몰아부쳤고 그럴수록 가야연맹은 그 힘이 약해져 갔습니다.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으로 가야를 지탱하던 대가야에 대한 신라의 공세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대가야 내부에서는 국가 존립을 위해 백제와 신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두고, 친 백제파와 친 신라파로 갈라져 내홍에 휩싸였고, 우륵은 친 신라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외교정책을 두고 양측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친 백제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540년대 후반쯤 우륵은 가야금을 품에 안고 신라로 망명했습니다. 우륵이 신라로 건너간 것은 대가야가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섰음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554년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관산성 전투 이면에는 백제와 신라가 함께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았는데 이 때 얻은 백제의 땅을 다시 신라가 차지하여 백제와 신라간의 동맹은 깨지게 됩니다.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의 실지 회복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뒤 늦게 안 성왕은 554년(성왕 32년)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며 여기에는 가야의 원군도 합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백제군을 대파하고 백제의 좌평(佐平) 4명, 사졸 2만 9,600명을 베어 죽이니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간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백제 편에서 싸웠던 대가야가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이듬해인 554년에 비사벌(창녕)에 하주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560년대 함안의 아라가야까지 신라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561년 2월 신라 진흥왕은 창녕 땅을 순행해 척경비를 세웁니다. 그리고 562년에는 이사부가 대가야로 쳐들어왔습니다. 사다함이 대가야로 쳐들어가 전단문에 들어서 흰 깃발을 꽃으니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쩔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대가야가 조금 저항하며 백제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시 백제는 도와줄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9월, 대가야가 계속해서 버티자 진흥왕은 대장군 이사부에게 20,000명의 병력을 주어 토벌하게 했다. 이사부가 대가야에 다다르자 도설지왕을 포함하여 모두 일시에 항복함으로써 대가야는 멸망했는데요. 520년간 이웃으로 공존했던 가야 여러 나라들은 강자의 패권으로 전체를 통합하지 않았습니다. 개별성을 부정하지 않는 건 가야의 존재 방식이었으나, 동시에 멸망 원인이 된 것입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가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황옥은 진짜 인도에서 왔을까. (0) | 2024.04.29 |
---|---|
높은 산에 묻힌 대가야의 왕들 (0) | 2024.04.23 |
김수로의 건국설화와 그 의문점 (0) | 2023.07.27 |
고대국가시대 무역항 늑도 (0) | 2023.07.26 |
멸망 후 가야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0) | 2023.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