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에 묻힌 대가야의 왕들
2024. 4. 23. 07:1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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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모주는 가야 지역에서 여신으로 숭배되던 인물로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최치원의 저서 석리정전(釋利貞傳)을 인용한 부분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정견모주 이야기는 유독 한국의 여러 시조탄생신화 중에서도 산신이 중심이 된다는 점은 좀 특이한데,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군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릉급 무덤들이 평지나 산능선자락 정도에 있는 것과 달리 산꼭대기 능선에 만들어졌던 것도 특이한 점입니다.
가야산은 삼국시대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서 우두산(牛頭山)이라 불렸고 가야의 산신제 때는 소를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우두(牛頭)는 소두라고 발음할 수 있는데, 삼한지역의 성지였던 소도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한, 우두산(牛頭山)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소시모리라는 설도 있습니다.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마을 뒷산이 가야산 기슭이다. 가시덤불을 헤치며 산 속으로 200m쯤 들어서자 잣나무 두 그루가 받치고 있는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길이 15m 높이 7m의 거대한 이 바위는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발길이 닿았단다. 이 마을 터줏대감 신덕수[72]씨는 “정월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목욕재계하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른바 대가야의 첫 왕을 잉태한 가야산 여신을 기렸던 정견모주의 제단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시간 남짓 더 오른 가야산 중턱, 서장대 주변에는 가야산성을 쌓는데 이용됐던 수천수만 개의 돌이 허물어져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성벽으로 남기엔 기나긴 세월을 감당하기가 버거웠으리라. 동남쪽 능선을 100m쯤 오르자 큼지막한 돌들을 받침대로 삼은 길이 5m의 바위가 산 정상을 향해 누워 의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마바위’ 또는 ‘상아덤’으로도 불린다. 정견모주가 하늘인 ‘이비가(夷毘訶)’를 맞을 때 탔던 꽃가마였다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이 길목이 출입통제 지역으로 묶여 사람의 발길이 끊겨 있었다. 역사와는 상관없이 길이 통제된 것이 자못 아쉽기만 하다.” 『살아있는 가야사 이야기』
이 글에 나오는 주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30년 전까지만 해도 정월 보름날에는 사람들이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의 산신제를 지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마바위는 정견모주가 혼인하기 위해 탔던 꽃가마라고 했습니다. 꽃가마를 탄 수줍은 새색시 정견모주의 모습이 상상할 수 잇습니다. 여신에게 인간의 풍습을 덧입혀 아름답게 채색한 것은 산신 정견모주를 사람들이 얼마나 가깝게 여겼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건국신화는 건국 초기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소국으로 출발하다가 주변의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혼란을 겪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자신들의 신성함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가야의 정견모주설도 건국초부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이야기가 만들어질 시기를 5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대가야는 4세기 중엽 이후 가야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대가야가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5세기 후반 경에는 가장 두드러진 세력으로서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견모주 신화」는 한국의 고대 건국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천부지모형(天父地母型)’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환웅과 웅녀의 결합으로 단군이 태어나며, 해모수와 유화의 결합으로 주몽이 태어납니다. 한 나라의 건국 시조가 천신과 지모신의 결합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천부지모의 신성한 혈통은 천지를 아우르는 사람만이 건국 시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정견모주 신화」는 우리 고대국가 건국 신화의 전범(典範)을 따르면서 대가야의 성산 가야산 산신에게서 건국왕이 탄생한다는 독자적 지역성을 가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흥미로운 점은 가야산신 즉 여신을 갖오한 것으로 정견모주설에는 천신인 이비가가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정견모주에 있다는 것이며, 대가야를 금관가야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정은 대가야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가야의 왕들은 신화 속에서 가야산신의 자손이라 자처합니다. 이것은 대가야뿐만 아니라 인근 연맹국들에게도 받아들이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가야산신의 후손, 이는 바로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수로왕과 형제라는 것도 명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가야 연맹의 주도권이 김해 금관국에서 고령 대가야국으로 옮겨간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도 대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국의 주도국이 되었는데 계기가 된 사건은 바로 400년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의 남정이었습니다. 이 때 고구려 군대가 낙동강 하류지역까지 내려와 가야까지 토벌했고 그 과정에서 전기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고고학계의 유물을 살펴보더라도 전기 연맹의 중심지인 김해‧창원 지역의 초기 고분 유적이 풍부했지만,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에는 그 중심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많은 대형 고분들은 고령‧합천‧함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고구려의 남정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입니다. 전기연맹 해체시기에 그 중심지인 경남 해안지역 선진문화가 파급되면서 철산지가 개발되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에 봉토 규모가 50미터에 이르는 대형 고분이 등장했습니다.
그 중 지산동 고분은 대가야국(大伽耶國)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고령(高靈)지역에 대형봉토분이 밀집 조영된 최고지배자집단(最高支配者集團)의 고분군입니다. 고령지역에는 대체로 면 단위마다 봉토분이 밀집한 고분군이 산재해 있는데 그 중에도 지산동 고분군이 중심고분군에 상당합니다. 가야의 중심고분군들은 보통 평야지대를 향하여 뻗어내려 가는 주능선의 정상부를 따라 형성되는데 지산동 고분군 역시 그러한 입지를 취하고 있고 최대형분이 모여 있는 고분군입니다. 이러한 고분이 평지나 구릉지가 아닌 높은 산 위에 묻힌 것은 바로 신화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가야의 왕들은 고령‧성주‧합천 등 경상오두 지역의 진산인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후손임을 자처했고 따라서 그들은 죽어서도 가야산신의 후예로 높은 산위에 묻히길 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가야인들은 죽어서도 그 주변에 묻혔으니 이는 대가야의 구성원들 역시 자신들의 왕들을 산신의 후손으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가야가 연맹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사건도 있습니다. 법흥왕이 제2등급인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낸 것입니다. 백제 동성왕이 신라의 여인과 혼인하고자 했을 때 신라는 그 배우자로 이찬 비지의 딸을 보냈습니다. 따라서 당시 가야연맹도 신라에게는 백제와 동등한 힘을 지닌 국가로 인식되었고 그 중심에는 대가야가 있던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강력한 대가야의 힘을 보여준 것은 바로 철이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고령의 인근 지역이었던 야로현‧산음현‧삼가현 등에서 철이 생산되었고 특히 야로현의 철산지는 조선시대 3대 철 생산지로 이름이 있었습니다. 가야가 철의 나라로 불릴 수 잇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대가야는 이러한 철 생산을 바탕으로 후기 가야의 맹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청동기는 철처럼 단단하지 못해서 농기구로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돌이나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농업생산력도 높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철기가 농기구로 활용되면서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철로 만든 무기도 등장하였습니다. 대가야가 당시 후기 가야 연맹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철 자원이 그 바탕이 되었지만, 이들에게는 가야연맹을 규합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면서 정견모주 신화가 부각되었고 가야산신의 후손답게 높은 산에 묻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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