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옥은 진짜 인도에서 왔을까.
2024. 4. 29. 07:20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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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許黃玉, 32년 ~ 189년)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후로, 허황후 또는 보주태후라고도 합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아요디아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지만 여전히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추측이 난무합니다.
1970년대 후반 그의 출생지가 시인이자 한 아동문학가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그 아동문학가는 펜클럽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에 들렀다가 아요디아를 다녀왔습니다.
“아요디아시의 수많은 건물에 쌍어문(雙魚紋)이 새겨져 있다. 그 모양은 김해의 수로왕릉에 있는 쌍어문과 흡사하다.”
그럼에도 여러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쌍어문이 아요디아국의 문장인가하는 점이고, 서기 1세기 허황후 때부터 전승되었는지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입증할만한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가락왕릉은 김해부의 성 서쪽2리쯤 되는 평야 가운데 있습니다. (…) 설치한 물건은 혼유석 1좌, 향로석 1좌, 진생석 1좌이고, 능 앞의 짤막한 비석에는 ’수로왕릉‘이란 네 글자를 써서 거북머리의 받침돌에 세워놓았으니, 이는 바로 경자년(1780년)에 특별 전교로 인해 고쳐 세운 것입니다. [또한] 돌담으로 둘러쌓았는데 앞은 제각까지 닿았습니다.’ 『정조실록』
그런데 이 기록에는 쌍어문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쌍어문은 건물들이 세워지고 나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로왕릉에 배치된 능감들의 기록을 정리한 『숭선전지』에 따르면 순조 24년(1824년)에 제각 동쪽에 안향각을 신축했습니다. 그 후 내신루 3간이 기울어져 전복될 것을 염려해 헌종 8년 (1843년)에 내신루를 헐고 그 자리에 단층 건물인 외삼문을 옮겨 세워 정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외삼문은 정조 17년에 세운 것으로 정문의 쌍어문은 정조 17년 신축할 때이거나 헌종 8년 이전 때에, 안향각의 쌍어문은 순조 24년에 그려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쌍어문을 당시 승려들이 새겼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쌍어문은 불교과 관련된 그림이지만, 이것이 아요디아국의 문장이라면 수로왕릉보다는 허황후릉 쪽에 그려지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황후의 출신지는 인도의 아요티아국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후대 사람들이 허황후의 출신지를 윤색시켰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교가 가지고 있는 권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황후 신화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한국 신화에서 불교‧유교‧도교의 영향을 받아 세부 내용이나 요소들이 윤색되거나 변형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일연은 환인을 제석이라고 해석하였는데, 일연이 제석이라고 주석한 환인의 의미 자체가 사실은 불교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불교적으로 윤색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윤색의 단계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면서 처음 한 것도 아니고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古記)』의 기록 단계에서부터 이미 나타났던 것이었습니다. 즉 환인은 산스크리트어의 Ṥakrodevend ra라는 말을 한자로 음역한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또는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고대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인드라(因陀羅, Indra)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인드라를 한자로 의역한 것이 제(帝)이며, 석가라(釋迦羅, Ṥakra)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 석(釋)이기 때문에 환인과 제석은 결국 인드라의 다른 번역에 불과한 것입니다.
단군신화에서의 환인이란 단어는 본래 하늘님, 또는 천신의 의미를 갖는 한국 고유의 말이 있었을 것이나, ‘고기’나 ‘삼국유사’라는 역사책에 기록되는 과정에서 당시 유행되던 천신의 뜻을 가진 환인, 또는 제석이라는 불교용어로 바뀌어 표현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윤색의 예로는 부여 신화에 나오는 가섭원도 그것이라 할 수 있는데 가섭원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 지역에 있었던 고대 동부여(東扶餘)의 도읍지입니다. 원래 가섭은 석가모니 10대제자 중 ‘두타제일(頭陀第一)’로 일컬어졌고, 석가모니의 열반 후에 제자들을 이끌었던 지도자입니다. 가섭원이라는 이름은 불교가 전래된 뒤 비슷한 음을 한문에서 차자(借字)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혁거세신화에서도 알영이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마야부인의 석가출생 이야기로부터 따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로왕을 비롯한 허황후 신화가 불교와 섞이게 된 것은 가야에 불교가 정착된 시기로 볼 수 있으니 8대 질지왕 이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로왕이 그녀[허황후]를 아내로 맞아서 나라를 다스린 지 150여 년이나 되었지만 이 당시 이 땅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신봉하는 일이 없었다. (…) 그러므로 본기[가야 역사서]에도 사찰을 세웠다는 기사가 없다. 제 8대 질지왕 임진(452년)에 이 땅에 절을 설치하고 또 왕후사를 세웠다. (…) 모두 이 나라 본기에 자세히 적혀 있다.’ 『삼국유사』
허황후 시기와 질지왕 사이에는 400년의 차이가 생깁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볼 때 허황후가 입국하면서 가야에 불교가 들어왔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허황후의 입국과 더불어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불교에 전래했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을 딴 절 장유사가 세워진 것은 왕후사를 세운 지 50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허황후의 신화에 대한 윤색을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그의 2남이 허씨라 칭했고, 7남은 쌍계사의 칠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후대인들이 허황후를 신성시했던 이유는 당시 가야가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가야 좌지왕 때 용녀 집단이 등장했고 이는 전통적인 기득권이었던 허황후 집단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좌지왕 때 신라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는데 이 때 허황후 세력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왕비족이 된 용녀 집단이 제거되었고 허황후 세력이 예전의 영향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질지왕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왕실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허황후 집단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해 주기로 하고 왕후사를 창건한 것입니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 (452년)에 (…) 왕후사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으며 아울러 남쪽의 왜까지 진압시켰으니 모두 이 나라 본기에 적혀 있다.’ 『삼국유사』
광개토대왕은 400년에 남정을 실시하여 가야지역을 공격하였고 왜는 가야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패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질지왕 때 가야지역에 남아있던 왜 집단이 복속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에는 단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만 이루진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왕후사 건립은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닌 가야 지역에 있던 왜 집단을 통합했고 그것에 대한 상징적인 모습이라 볼 수 있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에는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고 기술했고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고 했으니 금관가야의 건국 중심인 수로집단이 인접 세력인 왜와 연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수로왕이] 왕궁에서 서남쪽으로 60걸음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으로 궁실처럼 만들어놓고 기다렸다. 황후가 산너머 벌포 나루목에서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난 다음,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에게 보낸다.’라고 했으니 이는 고대 일본의 일부 지방에서 행해졌던 제사의식과 비슷합니다. 또한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에서는 ‘변진은 왜국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한 사람이 상당히 많다.’라고 하였으니 허황후가 왜국출신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다만 이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입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여전히 허황후 출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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