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를 생각하며 가야금은 연주한 우륵
2022. 7. 10. 10:1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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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은 중국의 쟁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가야의 가실왕이 12개월의 율려를 본받아 12현금을 만들고 이에 성열현 사람인 우륵을 시켜 12곡을 짓게 하였다. 그 후 우륵은 국운이 기울자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 제자 이문과 함께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갔다. 진흥왕은 우륵을 받아들여 국원(지금의 충주)에 편안히 거처하게 하고 대내마 법지, 계고와 대사 만덕을 보내어 그 업을 전수하게 하였다. 우륵은 이 세 사람의 재주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얏고를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삼국사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입니다.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명인 우륵에 관한 이야기로 우륵은 가야금 연주로 유명한 음악인이었습니다. 가야하면 철의 왕국으로 많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가야를 수식하는 이야기가 바로 '신비의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만큼 가야를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록이 적기 때문에 이러한 수식어가 붙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가야라는 명칭이 붙으며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있으니 바로 가야금이고 한글표기는 '가얏고'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야금으로 유명한 사람이 우륵이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적습니다. 언제 태어나고 언제 사망했는지 알 수 없으며 우륵이 어느 가야 사람인지 심지어 그가 모신 가실왕이 어느 가야 왕인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입니다. 다만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고령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왜냐하면 고령이라는 곳에 정정골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륵은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그 소리가 정정 울렸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야금을 만든 장소를 예전에는 동구뱅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이곳이 가야금을 만든 장소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야금 소리를 듣고 감동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야금을 만든 환상적인 장소라는 의미로 동구뱅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도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인데요. 확실한 것은 우륵이 가야를 대표하는 음악가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성열현은 여러 곳이 거론되고 있으므로 확실치 않습니다. 아마 망국의 음악인이어서 그런지 자료가 빈약한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금을 만든 사람은 가실왕이며 그런 명을 받아 우륵은 곡을 지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고령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정정골 전설과 동구뱅이 전설은 가야금을 만든 사람을 우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륵은 가야의 왕실의 전속 악사로 있으면서 여러 악기를 다루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악기 대부분은 중국 것이었겠지요. 그러다가 가실왕이 궁중의 중국악기들을 보며 탄식했고 이에 우륵에게 악기를 만들 것을 명했는데 가실왕의 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기록에 남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실제로 가실왕이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실왕이 만든 가야금을 우륵이 자신의 동네에서 연주했는데 백성들에게는 우륵이 만든 것으로 생각되어 해당 지역에서는 그러한 설화가 전해질 수 있습니다.
"나라마다 말이 다르듯이 음률 역시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느냐"
우륵이 가야에 있을 때 그는 가야금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 12곡을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이 역시 가실왕의 명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왕이 우륵을 시켜 곡조를 짓게 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가실왕 때에 만들어졌고 그 시절 가장 훌륭한 악사로 가야금에 맞는 새로운 곡조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아마 우륵일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왕의 명으로 만든 12곡 중 9곡은 당시 군현이름과 같다고 합니다. 아마 해당 지방민요의 성격으로 보고 있습니다. 향토색이 짙은 지방의 속악을 12개의 악곡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에서 우륵과 가실왕은 무척 가야를 사랑했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가야의 음악처럼 가야라는 나라가 영원하길 우륵은 마음속으로 바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가야연맹은 힘을 잃어갔고 532년 금관가야의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구해왕과 세 명의 아들이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는 다른 가야연맹들을 흔들리게 했을 것입니다. 금관가야의 멸망과정을 보며 위태하게 나라를 유지하는 것보다 신라에 편입되면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륵과 제자들은 나라의 마지막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를 상징하는 가야금을 연주한 우륵, 그러면서 그는 다른 나라의 표적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륵은 제자들과 함께 가야를 떠나게 되었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신라의 국원, 지금의 충북 청주였습니다.
551년 진흥왕이 청주로 답사를 왔습니다. 당시 음악 잘하기로 소문이 나있던 우륵을 진흥왕이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진흥왕 앞에서 우륵은 가야금을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륵의 연주를 듣고 난 후 진흥왕은 감동받았을까요. 우륵의 정체를 알고 나서 적국의 음악인인 그를 처단했을까요. 당시 가야연맹은 힘을 잃어가고 있어 멸망만 앞두고 있었고 그가 가야사람인지 몰랐던 진흥왕이 어떤 선택을 할지도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흥왕은 우륵을 잘 살도록 보살펴줍니다. 우륵을 가야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내치는 것보다 우륵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야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신라에 자연스레 흡수될 것이라는 생각한 것입니다. 이후 우륵은 국원에 자리를 잡아 음악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신라인 계고, 만덕, 법지를 제자를 삼았습니다. 계속된 음악활동으로 우륵은 185곡을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세명은 우륵에게 가야금 연주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를 배웠다고 합니다. 우륵은 연주인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에도 능한 지금으로 치면 만능엔터테이너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신라에서 이름을 떨쳤고 그러면서 우륵에게 배운 12곡을 줄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륵은 이에 분개하고 한동안 시름과 노여움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그대들의 편곡이 슬프나 지나치지 않고 즐거우면서 넘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제자들을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고 이렇게 칭찬한 우륵이었습니다. 우륵은 이들이 임금 앞에서 연주하도록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562년 대가야에 이사부가 2만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신라의 침입으로 가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가야는 왜 사라지게 되었을까, 6개의 연맹왕국이던 가야, 하지만 그 어떤 나라도 서로를 통합할 만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가야연맹이 차지한 지역은 낙동강을 끼고 있어 수상교통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왜와 교역이 용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점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가야를 노리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로 뭉치지 못했던 연맹체 가야는 외교능력도 떨어지게 되고 군사력도 6개로 쪼개져 다른 나라의 계속되는 침입을 견뎌내기에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중앙집권체제로 발전하지 못하고 연맹왕국단계에서 머물렀던 것이 멸망의 내부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이렇게 가야가 지도상에서 사라지면서 우륵에 대한 이야기도 더 이상 전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우륵과 관련한 유적도 찾기 힘든 실정입니다. 그나마 충주에 있는 탄금대가 우륵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인데요. 이 곳에 탄금정과 함께 우륵선생유적비,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이유는 우륵선생이 만년에 이곳을 거처로 하여 가야금을 타며 가야를 그리워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탄금대는 1000여 년이 지난 1592년 4월에 신립장군이 8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맞이한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신립 휘하의 장수 김여물은 아들에게 패전을 암시하고 항전의 뜻을 밝히는 편지를 띄웁니다. 지금은 충주인들의 휴식처로 이용되는 탄금대, 누군가가 이 곳에서 우륵을 기억하며 가야금을 탄다면 마지막까지 싸우다 산화한 조선군인들의 진혼곡처럼 울리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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