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고분 순장 풍습 그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

2022. 6. 24. 21:2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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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의식 순장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행해졌다.

 순장은 어떤 죽음을 뒤따라 다름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주된 시체와 함께 묻는 장례 습속이라고  합니다. 흔히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남편이 죽었을 때 신하나 아내가 그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고대국가에서도 행해졌던 이 의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고대국가에서도 행해졌습니다. 중국의 상나라에서는 많은 청동기 등의 껴묻거리와 함께 많은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였으며 고대 오리엔트, 이집트, 유럽과 아프리카 고대사회에서도 순장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노동력과 처첩의 인격이 중요시되면서 차츰 없어졌으며 대신 이를 대신하는 물건들을 넣기도 한 것입니다. 
"부여는 사람을 죽여 백 명까지 순장시켰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248년 고구려 동천왕이 죽자 새 왕(동천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무덤에 와서 따라 죽는 이가 많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전에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5명씩 순장했는데 이를 폐지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부여에서는 왕이 죽었을 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산 채로 왕과 함께 묻은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순장을 했을까요. 아마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죽은 이후에도 지금과 같은 삶은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을 경우 죽어서도 그 신분을 누린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어서도 자신의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순장은 대부분 강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고구려에서도 왕이 죽었을 때 이를 슬퍼하며 왕과 함께 묻히고자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는데요. 그래서 왕의 아들은 이를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일 뿐, 왕이 죽으면 신하가, 귀족이 죽으면 노비가,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순장당하기도 했으며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자연스레 폐지되었으니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이러한 것은 없어졌습니다. 순장 자체가 노동력의 손실로 이루어지거니와 불교가 전래되면서 죽음 이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즉, 죽은 이후에도 지금 모습 그대로 다음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사람들에게 믿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순장금지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는 지증마립간 3년 즉 서기 502년에 법률로 순장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528년 법흥왕 때에 신라에서는 불교가 공인되었는데요. 그러나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눌지왕(訥祗王, 411~457) 때 승려 아도(일명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의 집에 와 토굴방[土窟室]을 짓고 살면서부터라고 하며 이 밖에도 여러 설이 전래되나 어찌되었든 법흥왕이 공인하기 전부터 불교가 민간에 전파되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자연스레 민간에 불교가 퍼졌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존의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했을 것이며 아마 그 과정에서 순장에 대한 인식에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는 왕실의 고민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아마 순장 대신 부장품인 토용을 넣은 것은 그러한 고민의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신라는 지증왕 대에 이르러 순장을 금지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옛날 기록들을 보면 순장에 대한 풍습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동력이 중시되었던 사회에 왕이 죽었다고 100명이 넘는 사람이 죽는 건 당시로서도 크나큰 인력낭비입니다. 게다가 고구려왕이 죽었다고 왕의 만류에도 따라 죽었다고 하는데 과연 기록대로 순순히 따라 죽은 사람이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신라의 기록에서 보면 남녀 5명씩 순장했다는 기록, 즉 성별과 그 인원을 정해두었다는 것을 미루어 본다면 순장은 신라사회에서 폐지되기 전까지 일종의 관습이었고 아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을 것입니다.

순장인골 복원 모형 '송현'

그러면 우리나라 순장 사례는 어느 지방에서 많이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영남지방에서 사례들을 찾을 수 있으며 이 땅은 옛날 가야가 지배하던 땅이었습니다. 실제로 가야의 왕릉급 무덤에서 순장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가야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령 지산동 44호분에서는 36명이 넘게 순장되어 국내 최대 규모로 알려졌습니다. 한편 2004년~2008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순장당한 4명의 유골이 나왔습니다. 2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 그리고 연도는 420년에서 560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유골 중에서 상태가 온전한 인물을 복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이는 16세, 키는 154cm, 출산을 경험한 적이 없는 소녀로 알려졌습니다. 복원된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었으며 금동귀고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충치를 가지고 있는데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고 하며 종아리뼈와 정강이뼈에는 충격이 반복해서 가해진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소녀는 주인 앞에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시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명의 인골에서 순장자가 무엇을 먹었는지 분석했습니다. 이들은 쌀, 두류, 견과류 등을 섭취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2명의 남자는 주로 동물성 단백질을, 2명의 여자는 주로 식물 단백질을 섭취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아마 남자는 사냥을 통해 여자는 농사를 통해 음식을 주로 섭취했는지 성별에 따라 식단에 차이가 있었는지 아니면 기호의 차이였는지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에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한반도의 순장문화는 자생되었을까요. 아니면 바깥에서 유입되었을까요. 기록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여와 고구려는 순장이 있었습니다. 한편 순장묘가 발견된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청동솥이 발견되었는데요. 29호분에서 발견된 오르도스형 동복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 오르도스지역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유물은 북방 기마민족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유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방유목문화가 한반도남쪽까지 전달되었고 그 과정에서 순장풍습이 전달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북방 유목민족에게는 노동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빠른 이동이 필수였던 유목민족에게는 순장문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비화가야 최고 지배층 묘역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63호분에서 발견된 개 3마리는 순장견이며, 무덤을 수호하라는 뜻에서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분석이 나왔다.


순장당한 사람들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습니다. 순장당한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낮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아직까지는 순장의 실시는 노예제 사회의 증거라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하지만 송현동 고분에서 발견된 순장당한 소녀 송현이가 착용한 금동귀고리, 그리고 고령 지산동 순장자에게 발견된 금동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서는 육류와 곡류를 골고루 섭취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순장자들이 비참한 하층민생활을 하다가 순장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누리다가 순장당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인골의 형태를 분석하면 이들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간격이 비교적 일정하다고 합니다. 즉, 죽은 이후에 묻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 주목할만한 점은 신라의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신라양식의 금동관이 순장고분에서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신라왕이 지역의 유력자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신라세력이 새로운 지역을 편입하려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지배는 가져가지는 못하고 하사품을 내리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행사한 것으로 보는데요. 지역의 지배세력은 상당한 위세를 과시했을 것이고 그가 죽었을 때 이러한 순장풍습을 통하여 자신의 통치력을 과시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연맹왕국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가야에서 이러한 순장풍습이 마지막까지 남았다는 것을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합니다. 가야가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지 못해서 순장풍습이 유지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가야의 멸망 직전까지 순장풍습이 이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가야에서 다른 주변국처럼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 연맹을 통일하고 순장풍습을 폐지했으면 가야는 역사 속에서 더 존속할 수 있었을까요. 역사에서 가정이라는 것은 의미를 가질 수 없지만 노동력 상실을 감수하고 순장풍습이 늦게까지 남아있었던 가야가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먼저 멸망한 것은 피할 수 없는 국가의 운명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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