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의 김수로는 인도인이었을까.
2022. 6. 15. 15:2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728x90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 “난(나), 니(니)””니, 인거 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바나깜(반갑다)” 난, 서울꾸 완담(난, 서울로 왔다)””모땅(몽땅)””빨(이빨),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
위에서 설명한 단어들은 현대 타밀어와 우리나라말을 비교한 것입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나라 간의 단어가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서로 가까운 나라가 아닌 먼 나라 인도와 한반도에서 어떻게 이러한 언어적으로 비슷한 발음과 뜻이 나오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아마도 아주 먼 옛날에 고대 인도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44년에 가야에 도착한 석탈해가 김수로로부터 왕위를 빼앗겠다며 도전을 합니다. 김수로와 석탈해는 도술로 싸움을 했는데 석탈해는 싸움에 져서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수로가 500척의 배를 동원하여 석탈해의 뒤를 쫓다가 그가 신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 추격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사실 도술로써 경쟁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사실입니다. 아마도 먼저 있던 김수로 세력과 후에 들어온 석탈해 세력 간에 다툼이 있었고 이 싸움에서 김수로 세력이 이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김수로 세력이 석탈해 세력을 쫓기 위해 500척의 배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석탈해 세력이 패배했음에도 만만치 않은 힘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석탈해 세력이 신라에 등장하면서 신라에 배가 하나 도착했는데 이 배에 실린 상자 안에서 사람 하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석탈해라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즉, 김수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석탈해 세력이 신라로 흘러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한편 이러한 석탈해의 선조를 대장장이로 보고 있습니다. 철은 제련할 때 쓰는 숫돌과 숯을 호공의 집에 묻고는 자신이 선조가 대장장이라며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석탈해는 호공의 집을 빼앗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석탈해의 이름에서 그가 인도 출신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인도 드라비다어족의 하나인 타밀어 ‘ Sokalingam’이 ‘대장장이’를 뜻하는 말이고 타밀어 ‘Tale’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로써 석탈해는 ‘대장장이의 우두머리’라는 해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석탈해 세력은 가야로 흘러들어갔다가 김수로를 몰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다시 신라로 건너가서는 석탈해가 네 번째 왕에 오르면서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김수로 왕릉의 입구 위 나무판에 새겨진 쌍어문양을 인도의 도시 아요디아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가야’라는 명칭은 신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야를 건국한 세력 김수로는 외부에서 들어온 해상세력으로 인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드라비어어로 ‘물고기’를 뜻하는 ‘가야’를 나라이름으로 하여 가야연맹체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정리한다면 외부에서 김수로 세력과 허황옥 세력, 그리고 석탈해 세력이 들어왔는데 이들 간의 경쟁에서 김수로 세력이 승리하고 석탈해가 신라로 물러났으며 허황옥 세력은 김수로 세력과 연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김수로와 허황옥 세력이 연합했고 그 뒤로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다고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데 이들 부부에서 나온 자녀들 중 어머니의 성을 사용한 성씨, 즉 김해 허씨가 존재하며 또한 보통 왕과 왕비는 합장하거나 바로 옆에 무덤을 조성하지만 이들 부부의 무덤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에 조성되엇으므로 김수로 세력과 허황옥 세력이 각각 그 힘을 유지하였고 금관가야는 이 두 세력의 연합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가 인도에서 들어온 세력이라는 것은 합당한 주장일까. 이 주장의 근거는 건국설화에 나오는 ‘구지가’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구지가에서는 거북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이 거북이가 왕을 상징하고 구지가에서 머리를 ‘내어놓아라’라는 구절에는 왕에 대한 존경과 왕위에 오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또한 구지가를 부를 때 양손에 흙을 쥐고 노래를 부르는데 이런 의식은 현재 인도에서도 국가 경축행사 때 행해지는 것으로 따라서 김수로왕은 인도에서 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구지가의 뒷부분인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부분은 뒤에 덧붙여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지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며 이는 그런 학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또한 김수로왕을 시조로 모시는 가락중앙종친회에서는 김수로가 외래세력이라는 주장에 대해 전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와 그의 왕비 허황옥에 대한 사망기록도 전하고 있습니다. 김수로는 199년에 158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허황옥은 그에 앞서 189년 1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적어놓았습니다. 사실 현대에서 이 정도로 장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아마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 입장에서도 이러한 것을 기록하면서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있는 내용들이 신화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이 많다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사실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아예 근거 없는 기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록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야기를 적어야 할 무언가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김수로가 158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가야는 제 1대 수로왕이 서기 42년에 즉위한 이후 562년에 멸망하기까지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존재했던 나라인데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관가야의 왕은 10명입니다. 나라가 존속했던 기간이 비해 등극했던 왕이 적습니다. 이것은 후대 왕조와 비교하면 더욱 명확합니다. 가야와 비슷하게 존속했던 조선은 27대에 이르렀으며 500년보다 짧게 존속했던 고려는 34대를 전하고 있습니다. 역대 가야 왕들의 재위 기간을 보면 대부분 긴 기간동안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가장 짧게 재위한 왕이 제 6대 좌지왕으로 재위기간은 407년에서 421년으로 14년입니다. 그렇다고 제 2대에서 제 10대 이른 금관가야왕들의 재위기간을 보면 아예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 1대 수로왕의 재위기간이 42년에서 199년이라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각 나라의 시조를 보면 설화가 존재하잖아요. 그러한 것은 시조를 신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에게도 그에 걸맞는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구지가가 들어있는 건국설화와 허황옥을 맞이하는 이야기 등입니다. 그리고 그의 수명을 비정상적으로 늘려 그의 신성함과 위대함을 후대에 전하려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김수로가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김수로왕의 뒤를 이어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었고 그와 더불어 허황옥 세력에서는 왕비족으로서 역할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수로왕의 재위기간은 시조 김수로를 포함한 초기 가야 왕들의 제위기간을 다 합한 것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엄밀히 따진다면 김수로와 제 2대 거등왕 사이에 역사 속으로 이름없이 사라져간 가야의 왕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본다면 단군왕검이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아사달에 도읍을 정한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는데 당시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합니다. 현재 이것을 단군과 그 후손인 2세 단군, 3세 단군 등 고조선의 왕을 모두 단군이라 불렀고 이들이 통치한 기간을 합하면 1500년일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 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의 재위기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수로왕의 150년이 넘는 재위기간이 아예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다만 우리나라말과 타밀어의 유사성의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아직은 오리무중입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가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광태자가 도설지왕이 된 이유는... (0) | 2022.11.08 |
---|---|
가야를 생각하며 가야금은 연주한 우륵 (0) | 2022.07.10 |
가야 고분 순장 풍습 그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 (0) | 2022.06.24 |
임나일본부설을 뒤집는 가야의 철기 유물 (1) | 2022.06.19 |
파사석탑으로 보는 허황옥의 행적 (0) | 2022.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