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석탑으로 보는 허황옥의 행적

2022. 6. 12. 11:1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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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은 허황옥이 가야로 들어올 때 가지고 온 불탑이다.

경상남도 김해에는 오래된 탑 하나가 있습니다. 그 탑의 이름은 파사석탑이라고 부르는데 워낙 오래된 탑이라 그런지 1미터 50센티미터에 이르는 이 탑은 원형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심각하게 훼손된 채로 한 무덤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 무덤의 주인은 동시에 파사석탑의 주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덤의 주인은 가락국의 초대국왕인 김수로의 부인이자 김해 허씨의 시조 허황옥입니다. 그럼 가락국의 초대국왕의 왕비인 허황옥과 파사석탑 간에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금관(金官·김해) 호계사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비인 허황후 황옥이 동한(중국) 건무 24년(기원후 48년)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다.”(<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허황옥, 혹은 허왕후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기 48년 허왕후의 아버지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에 황천(皇天)이 나타나 ‘가락국의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낸 왕인데, 아직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다. 경들은 공주를 시집보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이에 허황옥은 부모와 작별을 하고 가락국에 오게 되었으니 당시 16살이었습니다. 아유타국의 공주가 가락국에 도착했을 때 김수로는 기뻐하여 사람을 보내 이를 맞이하려 했으나 16살의 소녀 허황옥은 수로가 보낸 신하들을 경솔히 따라갈 수 없다고 하여 김수로가 직접 나아가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허황옥은 “하늘에서 보낸 가락국의 왕 수로가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공주를 보내라는 부모의 꿈 이야기에 따라 이 곳에 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 “하지만 가는 도중 수신이 노하여 쉽게 가지 못하여 다시 돌아와 석탑을 배에 싣고 가니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세운지 6년 뒤인 서기 48년에 김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과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허왕후가 수신의 노함을 잠재우기 위하여 배에 태운 석탑이 바로 파사석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허왕후가 진짜 바다 건너서 가락국으로 온 외국인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에 따라 그가 직접 가지고 왔다는 파사석탑에 대해 연구가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파사석탑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 팀은 파사석탑에 사용된 돌의 산출지를 한반도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탑의 재질은 상당량의 엽랍석을 함유한 사암이라고 밝히면서 국내에서는 경남밀양과 전남완도군 노화도에서 엽랍석이 나오지만 파사석탑과는 다른 재질이라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내용처럼 배에 실어서 석탑 그대로 가락국으로 들여왔던, 아니면 외국에서 돌을 들여와 탑으로 제작했던 간에 파사석탑을 이루는 돌은 분명 해외에서 건너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황옥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가야로 왔을까.

그럼 여기서 또다른 궁금증은 ‘허황옥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쯤 어떠한 경로를 통해 가락국에 도착했을까.’입니다. 이것 또한 추측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허황옥이 출발한 아유타국부터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유타국과 비슷한 발음의 인도 도시이름을 찾다 보니 인도 북부 갠지스강 주변에 ‘아요디아’라는 도시가 있고 김수로왕릉의 입구 위 나무판에 새겨진 쌍어문양을 인도의 도시 아요디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한편 허황옥 능 앞에는 ‘가락국 수로왕비(駕洛國 首露王妃) 보주태후 허씨릉(普州太后 許氏陵)’이란 글자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허황옥 루트-인도에서 가야까지》의 저자인 고고학자 김병모 박사는 아유타국의 지배층이 1세기 초반에 북방의 세력에 쫓겨 중국 서남고원지대를 넘어 사천의 보주지역에 왔을 것이고 여기에서 허황옥이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즉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중국 보주에서 출생하였고 장강을 타고 황해를 건너 가락국으로 왔을 것이라는 겁니다.
한편 ‘아요디아’란 지명이 인도와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10여 곳에서 쓰이는 지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갠지스강 북부에 있는 아요디아를 아유타국이라고 단정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인도 북부 외에도 인도 동남부에서 아요디아 쿠빰이란 곳이 있는데 이 지역은 타밀나두 주의 주도인 첸나이 동쪽에 있는 해변으로 파사석이 많이 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올 때 가지고 왔던 파사석탑을 떠올리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타밀어는 한국어와 유사한 면이 있는데 무려 1800여 개의 언어가 우리말과 비슷한 뜻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 아요디아 쿠빰 부근에서 허황옥의 무리가 가락국으로 출발한 곳이 있지 않을까요.

허황옥과 함께 불교도 자연스레 들어오지 않았을까.

허황옥 일행이 가락국에 들어오며 석탑이 들어왔으니 그러면서 자연스레 인도의 불교가 유입된 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전에 우리나라에는 언제 불교가 들어왔을까 살펴볼까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우 소수림왕 2년(372년)에, 백제는 그로부터 8년 뒤인 침류왕 1년(384년)에 불교를 공인했으며 신라는 6세기인 법흥왕 14년(527년)에 이차의 순교를 기화로 불교를 공인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아도라는 사람이 위나라에서 불법을 닦아 고구려의 민간에 설파하니 그 때가 3세기였고 신라로 들어가 대궐로 들어가 불교를 전파하려다가 실패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신라에서는 공인 이전에 민간에서는 불교가 성행했을 것입니다. 가야와 관련된 것으로는 <삼국유사>가 시조 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이 시조모 허왕후를 위해 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결혼한 곳에 절을 세우고 액자에 왕후사라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로왕이 불교를 신봉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해 신어산 서쪽에 있는 은하사는 김수로왕 시대에 인도에서 온 장유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장유화상은 허황옥의 오라버니로 인도불교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은하사를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다만 허황후가 가락국에 온 기원후 1세기에는 아직 불상이 만들어지거나 불경의 문자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야에 전래되었더라도 불교를 전파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가야에 불교게 들어와 가야왕실에서만 불교에 대한 믿음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가야의 불교역사는 북방에서 육로를 통해 들어온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불교역사보다 앞선 시기에 전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불교전래에 대한 학설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을 통해 육로로 불교가 들어온 북방불교 전래설을 보편화된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남방불교전래설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충분치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락국의 초대왕후 허황옥, 가야의 역사에 있어 그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손길에 쓸려 닳고 닳은 파사석탑처럼 허황옥에 대한 역사의 기록도 많이 빈약합니다. 그럼에도 김해 김씨의 시조이자 김수로왕의 왕비, 그리고 김해 허씨와 인천 이씨의 시조로 허황옥이 우리역사에 남긴 것은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역사연구를 통해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들어온 경로가 확실하게 밝혀지고 인도불교와 관련된 가야문화유산이 발굴된다면 허황옥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좀 더 올라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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