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고산리 유적이 알려주는 사실
2022. 12. 7. 08:0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선사시대부터 고조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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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한반도에 좀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예부터 이곳은 사람이 살던 곳이었으니 그 신대가 신석기 시대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유적은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보다 5천년정도 앞선 것이었습니다. 고산리 선사유적지가 알려진 것은 1987년이었습니다. 당시 고산리 주민이 타제석창과 긁개 등을 발견하였고 이를 제주대학교에 신고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2년 유물지표조사를 벌여 중석기 후기에서 신석기 시대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화살촉 2백 여점과 박편석기, 긁개, 세기개 등 6천 여점의 유물이 나왔습니다. 이후에도 계속된 발굴조사를 통해 한반도에는 없는 고산리식 토기가 발견되었고 첨두형 석기등이 출토되었습니다. 고산리 유적인 기원전 1만 년 전후에 형성된 것으로 특히 한반도 지역에 비해 그 시기가 앞서 있기 때문에 다른 동아시아 지역과 연계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기에는 타제석기와 고산리 토기가 확인되었지만 생활터전인 주거지와 수혈유구 시설 등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10년 데 들어서는 수혈유구와 야외 노지, 석기 제작장 등 80여 기의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유구 내부에서는 태토(바탕 흙)에 갈대류 등 유기물이 첨가된 낮은 온도에서 구워진 고산리식 토기와 융기문토기 등의 토기류와 함께 화살촉, 찌르개, 밀개, 돌날, 망치돌 등 다양한 석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산리에서 확인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의 정주취락입니다. 이는 약 1만 년전 유적으로 기존의 한반도 최고 신석기 유적인 강원도 오산리 유적보다 2000년 앞선 것이었습니다. 1만 전에 집을 짓고 살았던 것입니다. 제주도 고산리 직경 4.5m 가량의 원형 지터가 발견되었는데 집터 하나하나마다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이는 집의 기둥을 세웠던 흔적입니다. 보통 8개의 기둥을 세워 원두막처럼 지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런데 집터가 서로 겹쳐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집이 허물면 그 위에 다시 집은 지은 것으로 몇 세대에 걸쳐 여기에 정착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동취사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주변에 비해 검게 그을린 돌과 깨진 돌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는데 음식을 익히기 위해 불을 뗀 흔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고 이것을 맞추어 보면 바로 고산리식 토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고산리식 토기란 것은 무엇일까.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되었기 그렇게 부를 것인데 이는 원시무문양토기로 덧무늬토기보다 이른 시기에 만든 유기물 혼입토기라고 합니다. 바탕흙에 섞여 있던 식물 줄기 등의 유기물이 토기를 굽는 과정에서 타 버리고 그 흔적이 표면 안팍에 남아 있으며 동북아시아 일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출현기 토기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원시적인 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제주도에서는 무늬가 들어간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띠 모양의 흙을 덧붙여 무늬를 댄 덧띠무늬토기, 끝이 뾰족한 나뭇가지로 표면을 눌러 찍어 무늬를 댄 압인문토기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토기가 변화했다는 것은 독자적인 문화가 자연발생적으로 진화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럼 왜 이 지역에서 한반도보다 앞선 유물이 발견될 수 있었을까. 구석기 시대 후기의 빙하기에는 제주는 한반도, 중국, 일본 큐슈지역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다 약 1만 년전부터 기온이 올랐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섬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주시 고산리를 포함한 여러 곳에서 후기 구석기의 모습을 지닌 석기 및 토기가 출토되었고 더불어 간도끼, 갈돌과 갈판, 숫돌 등이 출토되어 새로운 신석기 문화의 시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주가 섬이 되면서 집단의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대량 이동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제주도가 섬이 되는 시기가 마지막으로 빙하기가 끝나던 시기였고 섬이 되면서 신석기 시대가 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시기에 제주 고산리에 사람이 살았을 것이고 이후에 제주도의 주민이 되어 눌러앉았을 것입니다. 이 지역에 대해 1987년 조사가 있었는데 15만㎡에 이르는 지역세 10만 여점에 이르는 유물은 이 지역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적은 고산리에만 있는 곳은 아닙니다. 삼양동 유적, 외도동 우적, 오라동 유적, 도남동 유적 등이 있으니 제주도 전역에는 일찌감치 사람이 살았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에는 소수 집단으로 살았는데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집단화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정착생활을 이루면서 다같이 모여사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빙하기가 지나면서 기온이 올라가고 침엽수림이던 곳은 낙엽활엽수림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천년에서 2천년 전에는 지금과 비슷한 온대활엽수림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섬이라는 특성을 띠고 고립된 채 살아가지는 않았습니다. 동물사냥, 낚시, 조개잡이, 식물채집을 하면서도 한반도 남부와도 지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경로를 통해 신석기 문화가 들어왔습니다. 예를 들어 고산리 유적지에서 눈에 띄는 발견 중 하나는 바로 ‘결상이식(둥근귀고리) 1점입니다. 원형 중 40% 정도가 깨진 상태로 출토됐고, 육안으로는 옅은 하늘빛과 살구빛 사이의 색으로 옥 또는 규장암으로 추정되는데 제주도 내에는 옥이 생산되는 지역이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토착문화와 결합하여 제주도만의 선사문화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냥하고 갈돌, 갈판을 이용해 열매를 가공했습니다. 제주도 고산리에서 화살촉이 1700여 점이 발견되었는데 신석기 초기 제주도 고산리 선사인들은 수렵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제주도의 농경생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열악한 농경환경도 한몫 했겠지만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특성상 어로를 통해 풍부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었기에 농경에 대한 절박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한편 2001년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새의 발자국 화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슴, 노루에 이어 다양한 동물의 발자국이 발견되었고 식물화석, 게화석, 조개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발자국은 전세계에서 7군데 정도밖에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화석은 아시아에서는 중국에 이은 두 번째 찍힌 고대인의 발자국이자 대량 발견은 세계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발자국을 비롯한 화석군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럼 여기에 찍힌 화석의 주인은 언제적 사람이었을까. 과학적으로 정밀분석한 결과 150~160㎝ 정도의 성인의 발자국과 더불어 130㎝~140㎝의 사람 발자국이 있어 그보다 어린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9명의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발자국 화석 생성연대는 탄소측정 결과 무려 2만여 년 전으로 드러났습니다. 1978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보다 진일보한 ‘호모 사피엔스’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제주도의 사람발자국은 후기 구석기인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마지막 빙하기 때 제주도로 온 사람들, 사람의 것과 함께 매머드의 발자국도 발견되었습니다. 빙하기 때는 추웠을 것입니다. 매머드의 서식영역은 확장되었고 제주도 근처로 왔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매머드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인간이었고 매머드를 사냥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고기를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상아나 다리 뼈는 움막짓는 데에 활용하고 매머드의 뼈는 숯처럼 연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주도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은 매머드를 쫓아왔을 지도 모릅니다. 제주도의 선사유적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타이틀을 가진 곳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첫머리를 장식할 수 있는 곳이며 제주도의 사람발자국은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의 후손이 고산리에도 흔적은 남겼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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