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첫 도읍지는 어디였을까.
2022. 11. 22. 07:5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선사시대부터 고조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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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당시 식민사학을 심으려는 일본의 노력은 심했습니다. 그에 대해 우리민족 사학자들의 분노는 커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학자들은 당시 국내의 언론을 인용하여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미족사학자 정인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조선의 시조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기자조선은 없고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을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의 험독, 지금으로 따지면 요령성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삼한(三韓)은 지명이 아니라 한(汗)이나 간(干)처럼 크다거나 임금이라는 뜻의 일종의 존칭이며 고조선과 별개라는 정체세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수를 지금의 하북성 영평 일대를 흐르는 난하지역으로, 그리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너머에 있는 것으로 보면서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20세기 초반의 민족사학자는 이미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았으나 지난 100여 년간의 고조선의 중심지 왕검성은 평양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면서 낙랑군치소를 남쪽으로 옮겼다는 식민지시대의 일본 학자들의 추정을 따라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논란은 아직 여전합니다. 한 교수는 평양성은 왕검성이 들어설 수 없는 공간으로보았습니다.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축성하기 전 낙랑고분이 매우 한정적으로 지어지던 공간이었고 장안성이 건설되면서부터 무덤 축조마저 금지된 공간으로 보면서 이전까지 일시적으로 지역의 전통을 따르는 고분이 일시 축조되었을 뿐 지난 100여 년간 평양에서 고고학적 물증이 안나왔다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따라서 고조선 말까지 요동에 근거지를 두었다가 이후 한나라 군현이 설치되면서 대동강변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사학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나라가 서쪽에서 바다 건너 왕검성을 공격했다는 『사기』의 기록을 어떻게 할 것이며 평양에 성곽이 남아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동에 있는 왕검성을 함락시켰다면 거기에서 수천리 떨어진 평양에 낙랑군을 두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편 문헌에 근거하여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학계는 고고학적 근거로 평양에 있는 성곽이라며 토성리토성을 예로 들었지만 이 성곽에 대해서는 낙랑군 설치에 즈음해서 축성되었다는 시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분단 상황에 처해있어 일반학자들이 평양에 가서 고조선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 보내오는 논문을 통해 실정을 알아가야 하는데요. 2004년 북한의 한 교수는 고조선의 왕검성 일대를 평양으로 보는데 그러면서도 이 내용을 실은 논문에서는 왕검성 및 그 일대에 설치되었다는 낙랑군의 위치를 오늘날의 랴오허강과 인접한 연안도시인 개현 일대로 보고 있습니다. 기존의 북한학계는 고조선의 중심지를 요동이라고 하였다가 평양에서 단군릉이 확인되었다고 하더니 평양으로 고조선의 중심지를 바꾼 것입니다.
한편 북한학계는 1993년 단군릉을 공개하였습니다. 단군릉은 돌로 무덤캄을 만들고 그 위에 흙부지를 쌓은 돌칸흙무덤이며 주검칸과 무덤안길로 이루어진 외칸무덤인데 주검칸의 평면은 남북길이 276cm, 동서길이 273cm의 네모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본래 이 무덤에는 옛 선인과 신기한 장수를 그린 벽화가 있었는데 해방 전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도굴당하는 과정에서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단군릉에 대해 국내학계는 이 무덤이 고구려양식이라는 점을 들어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고구려 시기에 이를 개축하였기 때문이라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1년 기사에 ‘평양은 본시 선인왕검이 살던 곳’이라고 씌어있다고 하며 평양 단군묘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지』』, 『조선왕지실록』에도 나타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곳에 있는 인골에 대해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연대측정을 했는데 사망 연대가 대략 5000년 전으로 추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과에 대해서도 국내학계는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럼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민족사학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요동의 험독일까. 아니면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평양일까. 그럼 여기서 알아볼 것이 바로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지금처럼 경계를 이루고 국토를 설정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고조선의 지배 아래 있었던 백성들은 아마도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고조선이 있던 시기에 문화권을 가늠하는 유물 중에 동검이 있습니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이 제작 보급되었지만, 인접한 남부시베리아·오르도스지역에서 발견되는 북방식단검은 자루끝을 동물 모티프로 장식했으며 황하 중하류를 중심으로 한 중국쪽에서 나타나는 동검은 검자루는 원주형이고, 그 끝에는 삿갓모양 장식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들 북방식·중국식 단검이 날과 자루를 통째로 주조한 반면에, 비파형·세형단검은 별도로 주조하였으니 동검의 양식에 따라 고조선인들의 영역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파형 동검은 요동지역에 확산되었고 이후 한반도까지 전해졌으며 이후 세형동검으로 변해갔습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영역은 요동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65년 중국 랴오닝성의 성도 선양의 한 유적지에서는 비파형동검과 함께 청동거울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고 따라서 무덤 규모나 출토 유물로 볼 때 고조선 최고 지배자나 예맥계 지배자의 무덤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 지배자의 무덤이 많은 곳이 해당 나라의 중심지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군릉이 있다며 평양을 고조선의 중심지라 보았던 북한학계는 더 나아가 대동강 문명론까지 거론하였습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대동강 유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곳이 평양의 수도였다고 합니다. 반면 요동반도 남단에서도 주목할만한 고인돌이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갈고 다듬은 흔적이 보이는 고인돌입니다. 남한지역의 고인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쓴 것인데 거대한 돌을 갈고 다듬기까지 할 정도면 이는 엄청난 인력을 들이는 일이고 따라서 이 고인돌의 주인공은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요동반도 가이저우 스펑산 고인돌은 잘 갈고 닦은 건축물처럼 보이는데 여기서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자도 확인되었습니다. 사람의 손길이 더 닿은 고인돌이 위치한 곳이 고조선의 중심지라고 생각했을 때 평양보다는 요동반도를 해당지역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마천이 쓴 역사서 『사기』는 험독이란 곳을 고조선의 옛 수도로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 학자들은 랴오허의 서쪽에 자리한 타이안현 지역이 있고 이 곳에 손성자성이 있으므로 이 곳을 험독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발견되는 기와는 고구려의 것으로 고조선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신채호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서 하이청 부근이 고조선의 옛 수도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초기 고조우가 편찬한 역사지리서 『독사방여기요』에서는 “험독의 경계는 랴오허의 삼차하”라고 기록했으니 ‘삼차하’는 세 강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훈허강, 타이쯔허강, 그리고 랴오허와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이를 삼차하로 보고 있으며 『성경통지』라는 민주일대의 지리를 기록한 서적을 보면 삼차하는 세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바다에 이르는 일대 전체를 가르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은 랴오허 유역이며 하이청과 가이저우지역인 것입니다.
만약 험독에서 평양으로 수도가 옮겨졌다면?. 그 이유는 연나라의 침략 때문일 것입니다. 연나라는 중원의 패권에 장악하기 위해 북방을 안정시키기로 하였고 그 과정에서 고조선을 침략하여 고조선의 서쪽 2000여리를 빼앗습니다. 그러면서 험독은 고조선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게 되었고 고조선은 수도를 옮기며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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