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어떻게 망했을까.

2022. 11. 14. 08:0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선사시대부터 고조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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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진격로

기원전 5세기말 중국은 전국 7웅이 자웅을 겨루는 전국시대였습니다. 그 중 연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대동강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고조선은 세력을 회복하여 연나라의 동쪽 땅을 빼앗았습니다. 기원전 206년에는 최초의 중국의 통일왕조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가 그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당시 한나라를 위협한 최대의 적은 북쪽의 흉노와 동쪽의 고조선이었습니다. 당시 고조선은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남쪽 국가들이 한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개무역으로 이득을 챙겼으며 흉노와 제휴하여 한나라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당시 흉노는 한나라에게 가장 큰 적이었으므로 한나라의 1대 황제 고조는 이를 정벌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묵돌선우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패배하고 이들에 대한 정책을 두고 한고조와의 갈등이 일어나자 연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 조공해야 했으나 한무제 때 이것이 역전되었습니다. 흉노를 제압한 한무제는 남으로 남월을 평정하고 곧바로 고조선에 대한 정벌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명분이 없는 전쟁은 없었습니다. 일단 한무제는 고조선에 사신으로 섭하를 보냈습니다. 당시 이를 통해 회유와 협박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의사전달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뜻이 어찌되었든 고조선의 우거왕은 단칼에 거절합니다. 아무 소득없이 돌아가야 했던 섭하는 국경까지 자신을 호위해준 고조선의 비왕 ‘장’이란 인물을 제거하고 도망칩니다. 그리고 한무제에게 고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니 한무제느 섭하에게 요동동부도위라는 벼슬을 내립니다. 이에 고조선도 군사를 일으켜 요동으로 쳐들어가 섭하를 죽여 버렸습니다. 마침 고조선의 침략의 명분 찾던 차에 이 일을 계기로 이루어진 한나라의 침략으로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조선 멸망 내분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수군 7000명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출발했고 좌장군(左將軍) 순체는 육군 5만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합니다. 이른 바 수륙양면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우기 위한 한나라 장수 간에 견제가 생기면서 누선장군 양복이 7000명의 선발대를 뽑아 왕검성에 먼저 이르게 했습니다. 우거왕은 한나라의 군대를 보고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수가 얼마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즉시 공격을 하여 양복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합니다. 한편 좌장군 순체도 선발대가 고조선에 패하여 흩어져 버렸고 본대도 패수 서쪽에서 고조선 군대를 상대로 이기지 못했습니다. 전쟁은 교착상태로 빠졌고 사실상 1차전은 고조선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에 한무제는 잠시 전쟁을 멈추고 위산을 보내어 고조선과 협상을 시도합니다. 잉 고조선은 태자를 협상대표를 보냈고 그와 함께 1만 여명의 군대를 같이 보냈습니다. 태자는 1만 여명의 군대와 함께 패수를 건너려 했으나 한나라 사자 위산은 의심을 품고 무장을 해제한 후 패수를 건너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의심을 한 태자는 그 길로 군사를 돌려 가버리니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협상무산 소식에 한무제는 화가나 그 책임을 물어 위산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한나라는 다시 고조선에 대한 군대를 동원하였습니다. 좌장군 순체는 패수를 지키던 고조선 군대를 격파하여 강을 건넜고 이어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 서북쪽에 주둔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복도 왕검성 남쪽에 주둔하니 왕검성은 한나라의 군대에 포위되었습니다. 하지만 우거왕은 성문을 닫고 지키니 몇 달이 지나도 함락은 되지 않았습니다. 이쯤 되니 한나라 군대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좌장군 순체는 공격을 주장하였고 양복은 이전의 패배를 상기하면 신중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더욱 전쟁이 길어지자 한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고 전쟁터로 보냅니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는 누선장군에게 성을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그가 약속을 어겨 일을 그르쳤다며 양복이 고조선과 내통하고 있다고 모함합니다. 이에 공손수는 양복을 체포하여 본국으로 압송하고 그 군사를 순체의 지휘아래 두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무제는 공손수가 멋대로 군제를 꾸며 합친 것에 분노하여 공손수를 죽여 버립니다. 결국 좌장군 순체만이 남아 고조선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니 고조선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왕검성 안에서도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뉜 것입니다.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도(韓陶), 니계(尼谿)의 상(相) 참(參), 장군 왕겹(王) 등이 항복을 주장했으나 우거왕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 한음, 장군 왕겹, 조선상 로인이 도망쳐 한나라에 투항하였고 그 과정에서 로인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초 한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한 네 명 중에 니계상 참만이 남았습니다. 한나라에 항복한 사람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한나라로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니계상 참은 왕검성에 남은 이유는 아무래도 이 네 명 사이에도 의견 충돌이 있던 것으로 보이나 아마 기회를 엿봐 니계상 참은 정권찬탈의 기회를 보았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더 큰 그림을 짰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 여름, 니계상 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제거하니 그 또한 한나라에 투항합니다. 우거왕이 제거되었음에도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우거왕의 신하였던 성기(成己)가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한나라에 대항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격론을 주장하던 순체는 오히려 내부분열책이 좋은 방법임을 알고 우거왕의 아들 ‘장한’과 노인의 아들‘최’로 하여금 백성을 회유하게 하고 성기를 죽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왕검성도 함락되었습니다. 그 때가 바로 기원전 108년입니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켰으니 전쟁에서 이긴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전쟁에서 이긴 장수들은 그 공로로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좌장군 순체는 성로 공을 다투고 다른 장수를 시기했다는 죄목으로 기시형을 받았는데 기시란 죽은 시신을 길거리에 내다 버려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게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누선 장군 양복은 죽음은 면했으나 평민으로 강등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을 배반한 장군 왕겹은 평주후(平州候)로 책봉되었으며 식읍(食邑) 1480호(戶)를 하사받았고 니계상 참은 홰청후로 책봉되었으며 식읍 1000호를 받았습니다. 상 한음은 추저후로 책봉되었으며 식읍은 540호를 받았으며 우거왕의 아들 장은 기후(幾候)가 되었고 로인의 아들 최는 저양후(沮陽候)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적 치하는 사실상 고조선 멸망은 지배층의 내분에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조선을 배반하고 한나라 무제에게 상을 받은 이들의 부귀영화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108년 4월에 책봉된 왕겹은 이듬해에 사망했고  상 한음도 왕겹이 사망한지 18년 뒤에 사망하였는데 왕겹, 상 한음 둘 다 후사가 없어 대를 잇지 못했습니다. 니계상 참은 고조선의 포로를 숨겨준 죄로 옥에 갇혀 병들어 죽었습니다. 우거왕의 아들 장은 기원전 107년 3월에 책봉되었다가 2년 후인 기원전 105년에 처형되었으니 고조선의 모반을 획책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아마 니계상 참과 우거왕의 아들 장이 죽은 데에는 아무래도 이들이 고조선인이라는 이유가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조선 멸망의 가장 큰 공을 세웠지만 한나라 입장에서는 이들은 잠재적으로 반란을 모의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한나라에 투항하여 고조선 멸망의 일등공신이었음에도 후에 모를 고조선 부흥운동의 씨앗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삼국유사』‘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의 기록에서는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을 이루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 유민들이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뒤의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고조선 사람들이 남하했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설치한 한사군(낙랑, 진번, 임둔, 현도)도 오랫동안 있질 못했습니다. 고조선 백성들이 강력 반발에 진번, 임둔은 곧 없어지고 현도군도 서쪽으로 밀려나니 남은 낙랑군도 이름만 유지하다 313년에 고구려의 공격에 쫓겨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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