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전쟁의 현장, 부여 송국리 유적

2022. 11. 19. 08:2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선사시대부터 고조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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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송국리 유적

2004년 대전시 유성구 장대동에서 선사시대 유적이 발굴되었습니다. 갑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야트막한 구릉인데 정상부근에서는 청동기 분묘와 원삼국시대 집터 등 15기의 유구가 확인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집터는 대부분 불에 탄 상태였습니다. 바닥에는 토기들이 깨져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바로 청동기 시대의 약탈 현장입니다. 청동기 시대에 약탈이 벌어진 건 이 시기부터 계급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족장이 등장하고 이들의 권력은 부족의 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단적인 약탈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복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청동기 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는 장소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거지를 구릉지대로 옮기고 방어시설을 구축합니다. 망루나 목책을 쌓고 마을 전체를 해자로 감싸는 경우도 있습니다. 1997년 대구시 동천동 청동기 유적 발굴현장에서는 도랑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환호라고 하는데 환호는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일종의 경계역할을 합니다. 아마 이 때부터 우리라는 개념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때 만들어진 깊이가 1m, 폭은 2m 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시설은 방어용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환호 시설에는 투석전에 사용하는 돌멩이인 할석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한편 1975년부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부여 송국리 선사유적지에는 이중 목책열이 발견되었는데 각각 24m와 40m였습니다. 이 때 목책이란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를 의미합니다. 바로 주변 취락과 경쟁이 치열해졌고 이 때문에 청동기 시대에도 긴장을 하며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한반도 청동기 문화에 대해 압록강과 청천강 유역에서 싹을 틔우고 그 이후로 남하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기원전 12~10세기에 경기와 충청 일대에도 전파되었고 금강하류에서 또 하나의 청동기 문화가 나왔으니 충남 부여 송국리에서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서는 송국리 유형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송국리 유형의 유적지에서는 주거지, 농경지 외에도 공동의 분묘지, 저장시설, 공방(工房), 회의장, 외부와의 교역 장소가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보고 복합사회에 들어섰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송국리 유형의 유적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으니 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 인구 500명이 넘으면 부족사회로 간주되는데 송국리 유적은 주거지가 100기가 넘어가므로 본격적으로 부족사회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송국리형 집자리

주암댐 수몰지구의 일부 지석묘와 경남 진주 대평리 유적 옥방 8지구 2호 석관묘 등지에서 석촉이 인골에 박힌 상태로 출토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 토양은 석회질을 부식시키는 성질이 있으므로 인골이 온전한 상태로 나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발견된 인골은 행운과 같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두개골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치아도 역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매장할 때부터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개골을 발견된 근처의 다른 무덤에서는 돌화살촉의 일부분만 발견되었습니다. 돌화살촉이 선사시대 무덤에서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일부분만 발견되었다는 것은 바로 전쟁의 흔적을 이야기합니다. 즉 그 무덤의 시신은 돌화살에 맞았고 그 화살을 빼내는 과정에서 일부만이 몸에 박힌 채로 매장되어 현대에는 돌화살촉의 앞부분만 출토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사시대 전쟁의 흔적은 대평리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으며 여수 오림돌 고인돌 바위그림에는 돌검과 그를 경배하는 사람, 무기를 든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전쟁이 생각보다 많았음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신석기 시대에 비해 청동기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한 전쟁의 시작이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알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논농사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흔적은 부여 송국리 유적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량의 탄화된 쌀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견은 안정적인 식량확보를 가져다주었으며 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대규모 취락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계급이 생겨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동기사회에는 조금씩 분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공방(工房)이 등장한 것입니다. 석기를 제작하기 위한 작업대와 원석을 쪼갠 미완성 석기, 간석기 완제품 등이 출토되고 제작과정에서 생겼을 돌가루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맷돌과 저장시설이 마련되어 청동기 시대는 이전 신석기 시대보다 더 진일보하고 있었습니다. 

부여송국리 유적 이중목책

송국리 유적지의 돌널무덤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정교한 석기, 그리고 옥제품이 출토되었습니다. 아마 무덤의 주인은 엄청난 힘을 가진 청동기 시대의 지배자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송국리 유적에서는 청동기 도끼 거푸집이 발견되었으니 청동기시대 송국리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청동기를 제작했을 것입니다. 청동기라는 것은 무기에도 쓰였지만 제사에도 쓰였고 지배자는 이를 방울로, 거울로 만들어 그 위용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송국리는 그러한 지배계급의 위용을 떠올릴 수 있는 유적지인 것입니다.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은 바로 고인돌입니다. 대체적으로 큰 돌을 위에다 얹는 무덤이다 보니 이 무덤의 주인은 대체적으로 지배자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에 산재된 고인돌의 무게와 동원된 인원을 근거로 인구를 계산하면 5000명~10000명이 사는 마을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인돌은 그 수가 많은데 그렇게 따지면 한반도에는 정말 많은 크고 작은 부족들이 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여송국리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인돌 대신 돌널무덤이었습니다. 대개는 돌널무덤이 고인돌에 비해 그 수가 적고,  무덤 안에 껴묻은 물건으로는 청동기보다 돌검이나 돌화살촉이 많았다고 하는데 부여 송국리 유적지에서는 돌널무덤이 확인되었고 껴묻거리로는  비파형 동검 등의 청동기가 나왔습니다. 고인돌보다 돌널무덤을 더 강력한 힘을 지닌 정치적 지배자의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들을 아우르는 과정에서 과연 순순히 복종만 했을까. 세력이 비슷한 부족끼리 아마 치열한 다툼이 있었을 것입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부족 간 약탈, 정복 전쟁이 본격화하는 데 각 부족은 마을을 방비하려고 마을 주변에 긴 도랑(환호)을 파 외부 침입에 대비했다.

부여 송국리 유적지에서는 그 모습을 살 필 수 있습니다. 일단 부여 송국리 유적의 터를 보면 언덕 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는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인데 마을 주변에는 나무로 높은 울타리를 쌓고 울타리 곳곳에 망루를 세워 누가 쳐들어오지 않는지 망을 보도록 한 것입니다. 이 유적지에서 네모난 모양의 얕은 움집과 평평하고 동그란 모양의 깊은 움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많은 네모 집터에서는 화재의 흔적을 발견했으며 이 터를 둘러싼 목책도 불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목책 바깥에 있던 원형 집터에서는 이러한 화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들 간에 집단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혹시 그냥 화재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목책이 허물고 그 자리에 원형 집터가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럼 네모집터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원형 집터의 사람들은 그들을 피지배계층으로 삼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몰수 하지 않았을까요. 
농사가 시작되었다던 신석기 시대에 무력충돌이 있었다고 하지만 본격적인 전쟁은 청동기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 땅에 그만큼 많은 부족들이 있었고 따라서 다툼도 피할 수 없었고 따라서 청동기 시대 유적지에서 돌화살촉과 방어용 목책과 더불어  훼손된 유골, 그리고 불에 탄 집터 등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부여 송국리 유적지입니다. 하늘에 제사 지내고 농사 짓던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라 생각보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던 시기가 바로 청동기 시대입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청동기 시대의 모습에 안타까워할지도 모르겠으나 청동기 시대 부족 간의 갈등과 경쟁이 결국 후에 나타나는 고대국가 형성에 도움을 준 것 역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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