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은 실재했을까.
2022. 6. 10. 11:3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선사시대부터 고조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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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조선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3단계로 파악하였으니 그것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조선입니다. 그 중에 기자조선은 은나라 말기 기원전 1100년에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세웠다는 나라입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중국 고대 상나라의 마지막 충신인 기자가 주나라를 피해 동쪽으로 왔고 그리하여 단군이 스스로 왕위를 양보했다고 전합니다. 이렇게 세워진 기자조선은 1000년 동안 존속한 나라였습니다. 이른 바 기자동래설입니다. 고대 중국 왕조인 은나라에 있었던 현명한 사람 중 한 명인 기자가 당시 폭군이었던 주 임금의 정치를 피하여 동쪽인 조선으로 와서 지배자가 되었다는 학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자조선은 현재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고학적 사료가 없는데다가 후대에 조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자조선에 대해 고려와 조선시대에서는 인정을 넘어 신봉했습니다. 고려시대 때에는 이미 기자의 묘가 조성되었고 고려 숙종 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더욱 기자를 받드는 풍조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기자를 사실상 시조로 공식화했으며 나라 이름인 조선인 것도 주 무왕으로부터 기자가 책봉을 받았듯이 조선이란 나라도 명나라 주원장으로부터 책봉을 받아서 나라이름을 그리 정했다라는 논리를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공자가 『논어』라는 책에서 은나라의 삼인인 비간, 미자, 기자를 칭송했는데 공자가 칭송한 사람이 고조선을 세운 사람이라는 것에 조선 유학자들은 큰 자부심으로 작용했고 이이는 ‘기자 할아버지 덕분에 오랑캐였던 우리 민족이 교화되어 작은 중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후의 실학자들 역시 기자조선을 인정하고 기자할아버지를 사실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기자할아버지에 대한 인식은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사학자들에 대해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기자를 단군의 신하로 보는가 한편 기자조선을 역사에 서술하지 않았으며 최남선은 기자동래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일본학자들도 마찬가지여서 기자동래설을 부정한 것입니다.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 주왕을 정벌한 후에 기자를 풀어 주었다.” 『서경』
이 내용은 기자에 대한 첫 기록으로 주나라 무왕이 주왕의 탐학함을 한심하게 여겨 이를 정벌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주왕의 폭정에 옥에 갇혀있던 기자를 풀어주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과적으로 기자에 대한 최초의 내용에는 동쪽으로 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서경이 중국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없어졌습니다. 그러던 이 책을 다시 복원하게 되는데 그 중에 진나라 복승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복승이 구전되어온 서경에 주석을 단 책 『상서대전』을 만들게 됩니다. 이 때 상서란 서경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근데 이 책에서 기자가 조선으로 갔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내용이 실립니다. 이후 기자라는 사람에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구주라는 정치이념을 전수하고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망국이 된 은나라를 보며 맥수가라는 시를 지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더니 『한서 지리지』에서는 낙랑군은 기자가 다스렸던 나라로 기자가 교화를 해서 8조법이 전해졌다는 내용이 실립니다. 이에 더해 삼국지 위략에서는 조선의 왕들은 모두 기자의 후예라고 기록합니다. 아주 오래전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후대로 갈수록 그와 관련된 내용이 많아지고 또렷해집니다. 그러니까 당대의 기록에 비해 후대로 갈수록 내용이 덧붙여 조작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세기 이후에는 이 기자조선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자조선은 신화로 남겨지는가 했습니다. 그러던 1970년대부터 다링허 유역에서 다량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기족의 제후’라는 청동 네발솥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기자조선이 실존했다고 중국학계에서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고대 중국의 왕조에서는 각 지역의 제후들에게 청동그릇을 하사했는데 거기에는 그들의 공을 치하하는 글귀를 적어 넣었고 이것은 당시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족의 제후’라는 글귀가 곧 기자를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더 이상 입증하지 못하는 상황에 더 이상의 유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이곳에서 왜 이런 청동그릇이 발견될 수 있었을까. 이곳은 여러 문명이 뒤섞일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기온에 따라 북방의 민족들이 내려오기도 했는데 이 지역이 바로 그러한 지역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려온 민족의 중국의 상나라, 혹은 주나라와 교역을 하였는데요. 이들은 상나라, 주나라에게 전차나 무기를 전해주고 중국의 제사의식과 제사용기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세밭솥 토기가 바이칼 유역에서 발견되는 것도 이러한 교역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역의 교차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다링허 유역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주나라나 상나라에서 쓰던 청동솥이 발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자조선의 존재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정부가 이를 적극적으로 동북공정에 활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역사는 시작부터 중국인의 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인식의 근간이 됩니다. 즉,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 바로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군이 은퇴해 산신이 되었다는 시점과 기자 조선이 성립한 해에는 무려 160년 이상의 공백이 생깁니다. 그리고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의 왕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천 년의 시간이 지나 기원전 2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당대 중국학자들의 왜곡된 기록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 왜곡된 중국 측의 기록과 우리 측 문헌에 기록된 단군조선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그 접점이 생기지 않는 모순이 생깁니다.
백여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기자를 기자할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즉, 우리 민족의 시조처럼 여긴 것이죠. 이러한 기자가 국내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조선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나라 이후에 갑자기 등장했다는 기록들이라는 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복승도 한나라 때 사람입니다. 당시의 한나라는 고조선과 전쟁을 겪었고 이유는 고조선을 자신들이 보낸 사람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나라에 의해 고조선은 멸망하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는데요. 이에 따라 고조선사람들의 반발을 무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자라는 사람이 예전에 이곳에 와서 왕이 되었고 따라서 이 땅에 한사군이 설치되더라도 저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런 역사가 조작되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자할아버지라 불리려면 그만한 증거와 믿을만한 사료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기자할아버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우리 스스로를 작은 중국으로 여기고자 했던 소중화사상이 만들어낸 잘못된 역사지식일 뿐입니다. 어쩌면 실증고고학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우리 유학자들은 잘못된 사료만 가지고 검증과정은 생략한 채 그저 기자의 후손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고대사에는 아직 풀리지 못한 비밀이 많습니다. 반면에 있지도 않은 사실에 우리가 우리는 그런가 하고 현혹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 기자조선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고려, 조선시대를 살았던 유학자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것도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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