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인들은 왜 대한해협을 건넜을까.

2022. 11. 21. 07:5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선사시대부터 고조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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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유물

우리는 신석기시대하면 빗살무기토기를 떠올릴 것입니다. 어쩌면 그게 신석기를 기억하는 가장 명쾌한 유물로서 각인되어 신석기시대를 오인하게 만들 수 있는데요. 그 시대를 돌을 갈아 도구로 썼던 그 시대에 대해 원시적인 상황만이 생각되는 것은 지나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사시대에도 무역을 했습니다.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먼 나라와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우리와 가까운 일본과는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신석기 시대는 한일 교역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산동삼에는 조개무덤이 있는데 이 곳에서 흑요석제 석기와 작은 흑요석 조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된 흑요석들이 한반도의 것이 아닌 일본 규슈 서남쪽 사가현의 고시다케가 산지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남해안지역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규슈에서 생산되어 대한해협을 건너왔으며 이 두 지역 간에 교역망이 이미 신석기시대에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사실 흑요석은 국내의 경우 백두산과 제주도, 울릉도 지역등 극소수의 지역에서만 나는 것이고 일본에서는 후사이도, 혼슈, 규슈 등 비교적 많은 곳에서 산지가 확인됩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흑요석이 한반도 남해안에 건너온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빗살무늬토기인들이 섬으로 이주해 들어왔는데 이들이 일본의 흑요석을 남해안의 한 거점에 대량으로 공급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남해안 유적에서는 원석이 발견되므로 원석형태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흑요석이 발견된 동삼동 패총에서는 1500여 점이 넘는 조개팔찌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보편적인 소비를 넘어 이 조개팔찌를 교역품으로서 대량 생산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쓰시마 사가패총에서도 100여 점의 조개팔찌가 나왔는데 제작방식이 동삼동의 것과 일치했고 재료인 투막조개, 흰삿각조개 등은 암초가 많은 섬에 자라지 않고 한반도 남해안에 많이 서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창녕비봉리 패총 유적지

그럼 여기서 패총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패총(貝塚)은 조개무덤이지만 사실 무덤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생활하던 고대인들이 버린 조개껍데기들이 수 천년간 쌓여 형성된 신석기인들의 쓰레기매립장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고래뼈가 발견되었습니다. 신석기 시대의 고래뼈가 발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비가 올 때 조개껍데기의 칼슘이 녹아내리고 이것이 고래뼈를 보충하고 이로 인해 알칼리성이 강해진 땅에서 규산이 흘러나와 엷은 막을 씌우기 때문에 현대에서도 먼 옛날의 동물뼈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삼패총에서 발견된 고래뼈는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본래 울산의 반구대암각화에 대해서 청동기 시대의 유적지로 생각되었는데 동삼동 조개패총에서 발견된 고래뼈로 인해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시대 말기까지로 시대를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고래뼈로 당시 신석기인들이 고래사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기존의 신석기시대의 원시적인 어로로는 고래사냥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설을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동삼동 패총의 유물로 보면 한반도와 열도 간에 교역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 일본과 한반도 남해안은 해안선이 연결되어 걸어서 건너갈 수 잇던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배가 사용된 것이고 이것 역시 우리의 통념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할만한 유물이 발견되었으니 바로  비봉리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통나무 배입니다. 이 배는  길이 3m10㎝, 최대폭 60㎝에 두께 2.0-5.0㎝, 깊이 약 20㎝가 추정되며 재료는 소나무로 밝혀졌습니다. 신석기인들은 이 배를 만들기 위해 가공하려는 부분을 불로 태운 다음, 돌자귀 같은 날카로운 석기를 이용해 목재를 다듬었을 것이며 지금도 이 목재선박에 서 불에 태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료에 대해서는 아마 자연적으로 말라죽은 통나무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울산반구대 암각화에서도 배에 탄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암각화의 배에는 무려 18명이 타고 있으며 바로 당시 고래사냥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울산반구대 암각화에서 배를 탄 사람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동삼동 패총에서 신석기들과 관련된 돌고래 뼈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신석기인들의 고래사냥을 단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울산 황성동 유적에서 사슴 앞다리 뼈를 갈아서 만든 작살이 꽂힌 고래뼈가 발견되었고 이것들은 5000~6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신석기인들도 고래사냥을 했고 따라서 울산반구대 암각화의 제작시기를 신석기 시대로 잡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영도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혹등고래 귀뼈

우리가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가 되지 않아 아마 이 암각화의 제작시기를 청동기로 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비봉리 패총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의 배는 이러한 것을 깨부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나무로 배를 만들었라도 썩기 쉬운 재료이므로 현대에 그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거의 행운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비봉리에서 발견된 배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큰 것입니다. 그래도 신석기인들의 기술로 인해 이러한 배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입장에서 가공하기 쉬운 재료를 썼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통나무입니다.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는 통나무의 속을 파서 관으로 만든 것이 확인되었는데 통나무는 당시 사람들에게 최적의 재료였던 것입니다. 
한편 한반도에서 서식하는 사슴과 동물인 고라니의 뼈가 일본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반도에서 나는 투박조개를 이용한 조개팔찌가 일본에서 발견되고 일본의 흑요석이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 두 지역간에 교역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 신석기인들은 어떤 항로를 이용했을까. 당시 한반도 남부의 신석기인들은 부산에서 출발하여 거제를 지나 쓰시마섬으로 갔을 것입니다. 신석기인들은 북동방향으로 흐르는 해류를 타고 쓰시마섬을 거쳐 규슈를 갔을 것이고 반대로 귀항할 때는 규슈에서 남동풍을 타고 부산으로 곧장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배를 만들고 건너간다한들 그것을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비봉리 패총 1호 배의 모습

그럼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이 생명을 담보로 일본으로 건너가 흑요석을 들여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석기인들인 울산반구대 바위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래를 사냥했습니다. 고래를 사냥하기 위해 흑요석을 들여온 것인데 흑요석은 가볍게 치기만 해도 예리해지고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날카로운 작살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결합식 작날이라고 하는 도구는 톱날 같은 것이 있어 큰 고래나 상어를 잡는데 좋았습니다. 그들은 좀 더 윤택한 생활을 위해 대한해협을 건넌 것입니다. 
신석기인들에게 고래사냥은 쉬웠을까요. 그저 좌초된 고래를 잡아서 끌고 온 것은 아닐까. 울산황성동에서 고래 견갑골과 흉추 등에 뼈작살이 박혀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연안지역에서 느린 속도로 이동하는 고래를 집단 어로를 통해 직접 사냥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고래뼈를 분석한 결과 이 뼈들이 혹등고래와 참고래임이 밝혀졌고 이들은 주로 연안을 따라 느리게 이동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신석기인들은  연안지역에서 느린 속도로 이동하는 고래를 집단 어로를 통해 직접 사냥했습니다. 당시 신석기인들에게 고래 사냥은 로또와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생업도구와 식료로 효용가치가 높은 고기와 껍질, 기름과 뼈등을 확보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역에서는 문물 뿐만 아니라 기술도 전해졌습니다. 일본에서 결합식 낚시가 출토된 것은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지방이라고 합니다. 규슈지역의 결합식 낚시는 사슴뿔로 낚시대롱을 만들었는데 동삼동 결합식 낚시는 돌로 사용했다는 차이를 보일 뿐, 그 외에는 비슷하다고 합니다. 부산 동삼동 일대는 신석기 시대의 교역장이었고 그와 동시에 문화교류의 창구였고 또한 신석기인들의 치열함 삶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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