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은 위만 어떻게 보아야 할까

2023. 10. 23. 20:3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선사시대부터 고조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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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역사발전 단계상에서 후기(後期)에 해당하며, 일반적으로 왕조의 개창자를 국명으로 칭하지 않는 점에서 '위만조선'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위만왕조'나 '위만집권기의 고조선'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조선의 왕이었던 위만은 옛 연국(燕國) 사람이다. 연국의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속하게 하고 아전[吏]을 두고 장새(鄣塞)를 쌓았다. 진국(秦國)이 연국을 멸하고 요동 밖 요(徼)에 소속시켰다. 한국(漢國)이 일어나고 그곳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새(塞)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연국에 소속시켰다. 연국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들어갔고 위만은 망명하였다. 1000여 명을 모아 무리를 지어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넌 후에 옛 진국(秦國)의 공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과 만이(蠻夷)들을 복속하여 거느리고 연국과 제국(齊國)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사기』

여기서 위만의 출신지는 현재 논란 중인데요. 『사기』에서는 연나라 사람이라고 했으나 조선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상투를 틀었다’와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는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만은 당시 조선의 정권을 뺏은 이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으며 법과 문화 등에 일체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점으로 보아 위만을 조선인 계통의 자손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요즘의 '위만 = 조선인'설은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학설 중 정설인 '요동 => 평양 중심 이동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사방 2,000리를 뺏기고 나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동설을 기본으로,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침략당한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끌려가거나 연나라와 그 뒤를 이은 진나라의 지배하에 요동 지방에서 지냈는데, 위만이 그들 중 하나였고, 요동 지방의 고조선인들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에 귀순했다고 설명입니다. 
그럼 위만은 조선인일까. 일단 『사기』에서는 위만에 대해 연나라 사람이며 성이 위씨라고 하였습니다. 『후한서』에서도 ‘중국의 천하가 혼란에 빠졌을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 땅으로 피난을 갔으며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삼국지』「위지」에서도 ’연나라 사람 위만이 북상투에 동이의 옷을 입고 와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기록을 그대로 이해한다면 위만은 조선사람이 아니라 연나라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위만은 기존의 조선의 정권을 탈취한 외래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국호 고조선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 애초에 그가 조선인이어서 바꾸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그는 연나라인이나 이미 살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국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해당주민들에게 점수를 얻기 위한 일시적인 조처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국호를 바뀌지 않았고 이는 위만의 손자 우거왕 시기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애초부터 국호변경에 대한 의지가 없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연나라 지배 하에서 고통을 받은 조선인으로 살다가 혼란기를 틈타 고조선으로 넘어와 세력을 키워 왕위까지 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행색도 나름 의미를 갖습니다. 조선인의 복장을 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복민의 입장에서 위장전술로 잠시 조선인의 옷을 입고 행세한 것이라면 국호를 바꾸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가 자존심 강한 중국인으로서 고조선의 왕위에 올랐다면 국호를 바꾸었을 것입니다. 또한 변방의 국가 이름을 계속 쓴다는 것도 선뜻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덧붙여 ’조선 왕 만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었다.‘라는 기술은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는 뜻도 되지만 달리 말하자면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기 전까지 연나라에 살았던 사람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위만이 연나라 사람인 것이 조선인이 아니라는 것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은 위만에 대해 조선인이라고 하는 기술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당시 과연 국적과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을까라는 점입니다. 연나라의 진개가 조선을 공격한 것은 위만보다 80여 년 전인 BCE 281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날처럼 여권이나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시대가 이닌 당시에 3대가 외국에서 산 사람이었다면 그런 그를 굳이 조선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하는 물음이 달립니다. 어쩌면 이 연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는데요.  연나라는 현대 개념의 중국 한족들이 살았던 지역은 아니므로 연나라 사람이라 하더라도 위만이 한족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라 간에 경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곳은 여러 민족이 살았을 것이고 조선인도 북방민족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만은 여러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고 그러면서 고조선의 문화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조선인의 복장을 했다고 해서 조선인이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위만을 반란(叛亂)을 일으킨 자로 보았고,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이족(異族)의 입구자(入寇者)니, 이 어찌 우리 역대(歷代)에 들어오리오”라 하여 도적의 무리가 일으킨 정권이니 우리나라 역사에 포함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한편 1892년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조선사』에서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을 경계로 하며...조그마한 나라로서 동양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강대국들이 다툼을 벌이는 요충지...(고조선은) 북부 평안도 지역에 이미 주민이 거주했다’라고 설명하고, 이어 “단군은 황당(荒唐)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주류학자들이 말하는 소고조선론의 근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충실히 계승한 자가 이병도입니다. 그는 하야시처럼 우리 고대사를 크게 한사군 설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보았고, 실질적인 나라를 위만조선부터 인정했습니다. 이어 이병도는 고조선에 대해 “고조선의 중심지역은 서북해안지대인 대동강유역(평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압록강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고, 대동강변에 철저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어느 학자는 만주와 요서, 그리고 한반도를 아우르는 고조선의 넓은 영토를 밝혔고, 아울러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일개 거수국(제후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한사군이 북경쪽 요서(遼西)에 있었다고도 하였습니다. 사실상 위만조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논쟁의 씨앗을 안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중국학계는 고조선을 중국 역사의 범주에 포함시 키고 단군신화를 고대 동북지구 4대 종족 가운데 하나인 화하-한족계(華夏-漢族系)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기자조선, 위만조선은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친일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핀 바 있습니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가장 치열한 싸움을 했던 전장이 우리 상고사의 무대였다. 단군의 건국신화는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조작되었다. 때문에 고조선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문명의 시작은 중국계의 위만조선, 그리고 뒤이은 한사군에서 출발한다. 금속기 문명은 중국계의 이민으로 시작됐다. 고조선이 속한 시대는 당연히 석기시대에 속하며 원시사회에서 정치적 체제를 갖춘 국가 형태의 고조선이 존재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때문에 한국사는 처음부터 식민지로 출발했다. 이것은 한국이 안고 있는 지정학적 숙명이다."
단군신화에 등장한 방울은 청동기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실재는 이젠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위만은 연나라 사람으로 본래 조선인이었든 중국이었든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조선인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가지고 식민사학이나 동북공정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만조선에 대한 좀 더 확실한 연구결과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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