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로 귀화 그리고 위만 조선

2024. 4. 19. 07:1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선사시대부터 고조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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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에서 보고하기를, ‘회회교도는 의관이 우리와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혼인하기를 꺼립니다. 이미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람들이니 마땅히 우리나라 의복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 때 회회도의 기도하는 의식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조선 시대에 아랍인들이 조선에 귀화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고유의 의복을 착용하고 풍속도 그들 식으로 하고 이슬람교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으니 조선 정부에서는 이들이 조선에 정착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 것이 흔한 일이었던 것이고 조선 정부도 이에 대해 관대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고대로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경의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던 탓입니다. 
  ‘진한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나라의 망명한 삶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후한서』
  삼국이 건국되기 전에 한반도에는 마한으로 대변되는 한(韓)이라는 세력이 거주하였으며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중국계 유이민이 옮겨 왔다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일찍이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에 와서 산곡 간에 헤어져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바로 고조선 유민들도 경주에 와서 살았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신라와 가야의 전신인 되는 진한과 변한의 형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대 한반도 일대의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국 모두 '삼한'(三韓)에 속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한(韓)이라는 정체성은 통일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大韓帝國)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현대의 대한민국(大韓民國)과 한민족(韓民族)의 어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단군의 단일 자손이라는 이야기에는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반도에는 고대부터 다양한 종족과 민족이 정착해 각기 나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은 한반도가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을 거쳐갈 수 있는 지형이었기 때문이기에 그랬습니다.


  그럼 고대에 왔던 위만도 그와 같은 선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위만은 고조선으로 망명한 것은 한나라의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통일을 이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유방은 통일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아래에 있던 인물들을 제후로 임명했습니다. 이 때 임명된 연왕(燕王)은 노관이었는데 이 사람은 유씨 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유씨 성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유방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성씨를 가진 제후를 내치기 시작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노관은 흉노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북경에 중심을 둔 연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고조선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위만이 있었습니다. 
  위만조선은 초기 국가시대에 위만이 집권한 서기전 2세기 초부터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한 서기전 108년까지의 조선입니다. 위만 집권 이전을 고조선으로, 이후를 위만조선으로 부릅니다. 14세기에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합쳐서 고조선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일제강정기시기였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왕조가 신봉했던 천년 기자조선보다 이렇게 조작된 위만조선을 강하게 조명했습니다. “옛 조선의 역사는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지배로부터 시작되는 식민지배의 역사이므로, 지금의 조선이 이민족인 일본에게 지배를 받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가 그들이 조작하고 추진해나가는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식민사가들에게 위만이 중국인이었다는 것은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기』조선열전이나 『한서』조선전 등에서는 위만을 연나라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국인이 아니냐고 이야기하겠지만, 당시 연나라는 다양한 종족이 몰려 살던 나라였습니다. 그렇다고 위만이 조선인이라는 보장도 없지만,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해서 위만이 중국인이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관의 부장이었던 위만은 BC 195년 번조선의 기준왕에게 의탁하고 박사를 제수받고 상하장을 지키도록 봉함을 받았습니다. 노관은 번조선으로 귀순할 때에 상투를 틀고 호복(조선인 복장)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복장만으로 조선인으로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감이 있습니다. 망명할 때 환심을 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러한 복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준왕으로부터 서쪽 국경 일대를 할양받은 것을 보면 그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안심하여 맡긴 것일 수도 있으나 위만이 준왕의 의심을 떨쳐낼 만큼 충성심을 표시하여 준왕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상투도 조선만의 고유한 문화는 아닙니다. 진시왕릉의 등신도용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만이 데려고 온 천여 명의 무리들은 신분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전후 사정으로 보아 다수의 군인들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가 조선에 와서 번병(藩屛) 노릇을 하겠다고 자처한 것도 그의 무리가 군인으로 구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정착 후에 더 많은 무리들을 모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준왕이 숙위를 맡겠다고 나선 위만에게 쫓겨난 것은 바로 위만이 거느린 군사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위만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했으니 그가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 국호를 변경하지 않은 것이 위만이 조선인이다 단정지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위만이 토착 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해야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국호를 가만히 두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위만이 중국계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는 이미 고조선의 사회 질서에 편입되어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의 관직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거왕 때 조선상 노인과 니계상 참이 있는데 이들의 관직명 ‘상’ 앞에 ‘조선’, ‘니계’ 등의 지명은 붙은 것은 그들이 그 지역에 기반을 둔 토착 수장층이라는 것입니다. 
  이들 수장층은 어느 정도 힘을 가졌을까. 우거왕과 반목하여 진국으로 떠난 조선상 역계경은 2000여호를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중앙 정부의 고위직인 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토착기반이 단단해야 하고, 국왕도 역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인정해주어야 했습니다. 
 한편 위만조선을 세운 만왕(위만)은 중국 한나라의 후국이었던 연나라 출신의 망명객이 아니라 요동 지방의 고조선계 토착인이라고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위만조선을 중국의 식민지 정권으로 봤던 일본학계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위만이 중국 전국시대 말부터 한나라 건국 때까지 20여 년간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한 고조선계 인물이며, 위만조선은 작은 성읍 국가가 아니라 사마천이 '사기'에 묘사한 것처럼 대국이었다고 말합니다.
  위만은 준왕을 정점으로 이루어진 고조선의 정치체제와 주변 정치세력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자 외신(外臣)이 될 것을 약속하면서 요동태수를 통해 한(漢)의 조공외교권으로 편입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데 한과의 외교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고, 동시에 이 외교루트를 통해 선진 철기문화를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위만은 이를 기반으로 우수한 무기와 재물을 얻어 국력을 키우고, 더불어 군사적 대외 팽창을 시작하여, 주변의 소읍(小邑)을 침략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한에 대한 위협 세력으로까지 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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