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2023. 10. 23. 20:3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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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한권을 읽고도 시를 말하고/ 돈은 천금을 쓰면서 오히려 붖고해해/붉은 문 앞에 가서 온종일 머리를 수그리고 섰던 자가/ 문득 고향사람을 만나더니 그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구나.”
조선왕조 후기 양반관료들의 허풍선이 탐욕생활을 꼬집고 권력에 아부해 매관매직을 일삼던 그들의 부패상을 풍자한 시로서 유랑시인 김삿갓의 한문시를 번역한 것입니다. 
  김삿갓의 방랑인생은 조선왕조의 봉건적 신분질서가 무너져 가며 동요하던 19세기 전반기의 시대상황과 얽혀 있습니다. 중앙에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지배질서가 문란해지고 전국 각지에서는 양반관료들의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항거하고 나서던 시기였습니다. 김병연이 다섯 살 때인 순조 11년(1811년) 12월, 조정에서 서북인을 등용하지 않는 데 불만을 품은 홍경래가 농민들의 호응을 얻어 평안도 박천군 다복동에서 반란을 일으킨 데서 김삿갓이라는 인물이 나오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홍경래 무리는 반기를 들자마자 가산군을 함락시켰습니다. 이 때 가산군수 정시는 포로가되어서까지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합니다 홍경래 군은 정주, 박천, 곽산 땅을 휩쓸고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이 부사로 있던 선천을 공략합니다. 포로가 된 김익순은 정시와 달리 홍경래군에 투항해 목숨을 건집니다. 홍경래 난은 이듬해 봄 관군에 의해 평정됩니다. 그러자 김익순은 역적에 투항한 죄를 면하기 위해 홍경래 군 장수의 목을 돈을 주고사서 조정에 바칩니다. 그러나 이마저 발각되어 김익순은 참형을 받아 죽고, 집안에 폐족처분이 내려집니다. 김병연은 한 종의 도움으로 어머니 함평 이씨와 함께 황해도 곡산에 있는 이 종의 집에 가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4년 뒤, 황해도 곡산에서부터 광주, 이천, 가평, 평창을 거쳐 산골로 숨어들다 강원도 영월까지 와 살게 된 20살의 김병연은 향시인 백일장에 나가 김익순을 조롱하는 글을 써서 장원급제합니다. 백일장의 시제가 ‘정시 가산 군수의 출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였던 것입니다. 김병연은 타고난 글재주로 “한 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김익순을 한껏 통탄해했습니다. 그런 김익순이 바로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뒤늦게 어머니로부터 듣고 자책과 번민에 빠진 그는 22살 나던 해 방랑길에 오릅니다. 김삿갓은 철종 14년 (1863년) 3월 전라도 동복 땅에서 57살로 객사할 때까지 35년간을 유량하며 가는 곳마다 시와 일화를 뿌립니다. 동복에 묻혔던 그의 시신은 그로부터 3년 뒤 둘째아들 익균에 의해 영월땅으로 옮겨집니다. 
한편 김병연이 김익순의 백일장에서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을 비난하여 장원하였다는 일화와는 다른 기록도 전하고 있습니다. 1925년에 발견된 『대동기문』입니다. 여기서는 김병연이 관서지방에 발을 끊게 된 사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김익순을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쓴 것은 김병연이 아닌, ‘노진’이라는 사람이며 그는 평안도에서 활동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과시를 잘 짓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김병연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노진은 김병연을 시샘했습니다. 그리고 노진은 김병연을 몰아낼 생각으로 시를 하나 지었는데 그것은 김병연과 그 가문에 대한 조롱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과거시험을 볼 적에는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사주단자 앞에 써놓고 과거를 본다고 합니다. 따라서 과거 공부하는 사람이 자신의 선조에 대해 알았을 것으로 김병연이 자신의 할아버지 이름을 몰랐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김익순의 동생은 해남으로, 김병연의 아버지는 남해로 귀양 갔다고 합니다. 따라서 김병연에게는 과거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시험용 시문을 공부하며 기회를 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세도가의 힘을 빌려 출세하고자 했으나 그가 역적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합격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회가 사라지게 되자 그는 삿갓을 쓰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천지간의 죄인이라고 해서 삿갓을 쓰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다.’ 『대동기문』

김병연은 삿갓을 썼는데 방립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지방의 낮은 관직인 아전 등의 서리사회에서도 방립을 사용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거의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중에 있는 남자들의 외출용 쓰개로 사용하거나 농민의 쓰개로 쓰였습니다. 조선 말기 사진 속에는 행상인들의 쓰개에서 확인되거나 특수한 용례로는 여자의 외출용 쓰개로도 활용되어 특정 관직자의 신분을 표기하는 쓰개라기보다는 외출할 때 햇빛이나 비를 막기 위한 일상적인 용도로 쓰였습니다.
김병연이 삿갓을 썼던 것은 양반들의 표리부동한 이중생활을 상징한 것이었을까. 김병연은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삿갓을 썼던 것이었을까. 세도정치를 연 것은 김조순으로 세도정치는 19세기 초반부터 조선에 있던 정치형태였습니다. 김조순은 정조의 사돈이자,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장치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었는데 11세의 순조를 대신해 정권을 잡았으며 그의 핏줄들은 조정 요직들을 두루 맡았습니다. 조선후기 최고의 의결기구인 비변사 당상의 경우 장동 김씨가 15% 정도를 차지했고 정승들 명단에서도 장동 김씨의 항렬인 순 자 항렬, 근 자 항렬, 병 자 항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돈과 권력으로 지식과 야심을 사고 파는 세상이었고 당대 학자들은 백성들이 겪었던 고충들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김삿갓 역시 양반들의 수탈에 분노했습니다. 그는 붓을 들어 세상을 향해 외쳤습니다. 그는 양반을 동물과 벌레에 비유했으며 착취당하는 백성들을 동정했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대변해주는 김삿갓에게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일반 민중들은 김삿갓 시를 암송하고, 술자리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書堂乃早知)/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房中皆尊物)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돼 (學童諸未十)/선생은 와서 얼굴도 안보이네 (訓長來不謁)
이 시의 원문은 한문입니다. 한문을 해석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자 시의 뒤 세자 만 한글로 읽으면 욕설과 조롱입니다. 이처럼 한자로 쓴 언문풍월도 겉으로는 예사 한시와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새겨보면 숨겨진 해학과 풍자가 드러나는 희작(戱作)이 대부분입니다. 
아무튼 김병연은 유유자적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10년 단위로 집에 들어와서 자신의 아내와 아들과 딸들을 보고 또 나가고 그런 모양입니다. 대표적으로 32살 때인 1838년 음력 9월 21일에 아내가 죽자 집에 돌아와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에 경주 최씨 최흥주(崔興柱)의 딸과 다시 결혼했습니다. 최흥주는 1817년에 태어나 1863년 음력 6월 18일에 죽었습니다. 묘는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들인 차남 김익균이 "그만 여행하고 집에 돌아오라"는 편지를 수십 통이나 베끼어 아버지가 갈 만한 마을마다 이를 부탁하고 맡긴 모양입니다. 그런 편지를 아무 탈 없이 받은걸 감안하면 그의 엄청난 명망이 짐작됩니다. 그리고 아들과 집안사람들이 몇 번 귀향을 권하였으나, 그 때마다 심부름을 보내는 둥 따돌리고는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김병연은 마흔 줄에 들어 떠돌아다니는 생활이 힘에 부친다는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려고 왔는데, 가정의 일을 소홀히 하여 가족들로부터 냉대 받는 것이 다시 그를 바깥에서의 생활로 발길을 돌리게 했습니다.
김삿갓의 이름을 딴 라디오프로그램은 「김삿갓 북한 방랑기」였으며 뮤지컬로도 제작되었고 대한민국 록가수 신중현과 홍서범이 김삿갓을 소재로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김삿갓과 관련된 소설과 만화도 만들어져 현대에 그 이름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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