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추의 무관일기

2023. 11. 1. 07:4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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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추(盧尙樞, 1746년 2월 26일 ~ 1829년)는 조선(朝鮮) 후기의 무관으로 17세 되던 계축년(1762년)부터 순조 29년(1829년)에 84세로 사망하기까지의 68년의 일생을 적은 『노상추일기』가 남아 있습니다. 
『노상추일기』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으며, 간찰첩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4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노상추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35세 이전까지는 청년기로 고향인 경상도 선산도호부에서 가계를 경영하면서 무과 시험 준비를 하던 시기입니다. 이때는 주로 가족에 대한 내용, 시험에 대한 고뇌, 농사 상황 등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35세부터 60대 후반까지는 장년기로 무과에 합격한 이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양, 삭주, 홍주 등 타향을 전전하면서 보낸 30여 년간의 내용입니다. 60대 후반부터 노상추가 사망하는 1829년 9월 10일, 84세까지는 노년기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손자들을 훈육하고 문중의 일을 보는 등 가족에 전념하는 생활을 기록했습니다.
"비록 뜻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무관으로 세상에 나가 내 기상을 떨쳐 보일 것이다. 내 나이 스물 셋. 나는 마침내 붓을 던져버리기로 뜻을 정하고 무예를 시작했다."(노상추 일기, 1768년 7월 27일)
노상추의 무관일기가 전해지지만 본래 그가 꿈꾸던 것은 문관이었습니다. 그런 노상추가 23살에 문관의 길을 포기하고 무예를 수련합니다. 당시 무과는 천민들에게까지 기회가 주어지는 시험이므로 그의 진로변경은 그에게도 막대한 결심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문관으로 출세하기에는 영남 지방의 남인 가문 출신 비주류라는 한계와 넉넉지 않은 집안 경제사정이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과를 치르는 양반을 멸시하는 분위기에 영남지방의 양반들 중에서 무관이 드물었다는 것은 그의 결정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택 이후 과정도 순탄할 리 없었습니다. 무과로 진로를 바꾼 후 1780년 35세의 나이로 급제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더 걸렸으며 그러한 데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기동(耆洞) 하인이 와서 부고를 바쳤는데, 외종조 고모인 여홍호(呂弘㦿) 정랑(正郞)의 부인께서 어제 오시에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초상이 돌림병이 돌고 있는 시기에 났기 때문에 형수씨께서 초종(初終)에 맞추어 갈 수 없었다.’ -노상추의 1770년 윤5월 10일자-
해당 일자의 일기에서는 가족과 지인이 전염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례는 물론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전염병 때문에 민생이 도탄에 빠져 걱정스러워하는 마음이 내비치고 있습니다.  
‘당초에 가산을 받아 각자 살 때에 상속분으로 얻은 것이 논 1섬 9두락, 밭 90여 두락으로 가격으로 치면 500여 냥에 불과하였다. 10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모두 팔아버리고, 화림(華林)으로 옮긴 뒤에 산 것 역시 과거시험으로 진 빚 때문에 팔았으니 나의 500 여 냥은 모두 과거 보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니 앞으로 굶어 죽을 운수가 아니겠는가. 공명(功名)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1782년 5월 7일 일기)’

일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과거시험을 보러 간다는 것에는 상당한 경비를 필요로 했습니다.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적어도 말 한 마리와 노비 둘을 대동하고 이동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십년동안 과거 준비만 하여 집안 자체가 몰락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에 노상추가 치르는 무과시험에서 도구로 사용하는 활을 응시자가 직접 준비했고 활 하나에 어린 소 한 마리 값은 족히 되었다고 합니다. 시험용 뿐만 아니라 연습용으로 소비되는 활의 양도 상당했습니다. 노상추의 경우에는 한 해 겨울 동안 화살 5000발을 쏘았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합격자 방 열두 번째에 내 이름이 있었다.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조부 죽월공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월공이 돌아가신 지 25년 만에 우리 집안에 무과 합격자가 나오는 경사가 생긴 거이다.’ 『노상추일기』 1780년  2월 25일
문과 대신 무과 급제자의 홍패를 받았지만 그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홍패를 받고, 사흘간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그리고 친척을 방분하는 삼일유가를 마친 뒤 고향 선산으로 돌아온 노상추는 대대적인 축하연을 열었습니다. 그 때 집 옆 공간까지 빌려 잔치를 열었으며 밤이 되었을 때에도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그는 그 자신이 잘 공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10년 고생하여 무과에 급제했지만 이후로 4년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숙종 대에 무과 시험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관직을 얻기 위하여 수시로 한양으로 올라가 무관 고위직을 찾아다녀야만 했는데 영남 남인 가문 출신으로서의 한계가 임용탈락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1787년 ‘갑산진관’이라는 변방 지역의 말단직에 임명됐는데, 이 날 일기에는 세력이 없어 변방을 전전하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소 그의 조부 노계정의 훌륭한 행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정조가 1792년에 실시된 활쏘기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노상추를 발탁, 정3품 당상(堂上) 선전관(宣傳官)에 임명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파격 발탁에는 시대적 상황도 한몫했습니다. 정조는 늘 노론의 시해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는 무예에 능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변방에 있다가 노상추는 발탁될 수 있었는데 사실 여기에는 노상추가 부단히 연습하여 활쏘기 시험에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엔 삭주부사(朔州府使)가 됐으며, 이후 궁궐 수비를 책임지는 금군장(禁軍將)을 맡는 등 비교적 순탄한 관료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노상추는 결혼생활은 평탄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17세에 초례를 치루었으나 첫 번째 아내와 2년 만에 사별하고 23세에 맞은 아내도 6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고작 5개월 만에 세 번째 아내를 맞이했는데 당시 『경국대전』에서는 사대부의 경우라도 부인이 죽고 난 지 3년이 지나야 다시 장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는 부인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상추의 경우는 예외적이었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었거나 아들이 없다면 1년 이내에라도 혼인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첫 번째 아내와 두 번째 아내가 먼저 사망한 것은 아이를 낳거나 산후 조리 중에 사망한 것입니다. 여성의 경우 출산 시 사망하는 경우가 여성 10명 중 1명이었습니다. 
‘갑산(甲山) 사람 김철몽(金哲夢)이 와서 알현하면서 함경도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1월 초에 함흥(咸興)을 지났는데 돌림병이 이미 그곳에 도달해서 홍원(洪原) 땅의 사망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8도 사람이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 -1799년 2월 4일자-
그리고 노상추의 세 번째 아내가 사망할 1799년에는 전국적으로 큰 전염병이 돌았고 전문가들은 홍역일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18세기에서 19세기로 갈 때에는 온도가 연속적으로 0.2도에서 0.3도 상승하였는데 기후변동은 상당히 커서 가뭄과 홍수, 질병 등이 발생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노상추는 시대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심경도 토로했는데요. 천주교를 금하는 국법이 있어 이를 어길 적에는 잡아들이고 처형을 하는 데도 천주교가 근절되지 낳자 한탄하였습니다. 노상추의 일기에는 1807년 서얼 집안인 박춘노가 어머니 상을 당해 묘지를 썼는데, 이것이 노상추 집안의 분묘를 침범하였습니다. 이에 노상추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니 묘지를 쓴 일로 생기는 송사인 산송은 18, 19세기의 대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17세에 시작한 그의 일기는 84세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쓰여졌고 조선시대 무관의 삶을 그렇게 현대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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