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 정치 속에서 한 줄기 빛 효명 세자

2024. 1. 9. 19:5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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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승하한 조선은 순조가 즉위하면서 세도 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유력한 가문이 정치를 주도하였고 은 국정의 혼란과 민생의 파탄을 가져왔습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도정치를 억제하려 했고 왕정의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21세의 이른 나이로 훙서(薨逝- 왕이나 왕족의 죽음)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인물입니다. 
  효명 세자는 22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지만,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습니다. 세자는 [경헌시초(敬軒詩抄)], [학석집(鶴石集)], [담여헌시집(談如軒詩集)], [경헌집(敬軒集)] 등의 여러 문집을 남겼습니다. 거기에는 시조(9수)와 ‘목멱산(木覓山)’, ‘한강(漢江)’, ‘춘당대(春塘臺)’ 등의 국문 악장을 비롯해 40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좀 더 중요하게 평가받는 그의 업적은 연화와 관련된 예술이라고 합니다. 그는 청정한 3년 동안 해마다 부왕과 모후를 위해 큰 연회를 열었는데, 효명세자는 왕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왕실의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순조의 존호(尊號-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던 칭호)를 올리는 ‘자경전 진작정례의(慈慶殿進爵整禮儀. 1827)’,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하는 ‘무자진작의(戊子進爵儀. 1828)’, 순조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하는 ‘기축진찬의(己丑進饌儀. 1829)’가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효명세자는 큰 궁중 행사를 직접 관장하면서 상당수의 악장과 가사를 만들었고 궁중 무용인 정재무를 다수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정재는 음악과 노래, 그리고 춤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무용수들은 춤을 추면서 그 춤의 내용을 담고 있는 창사를 직접 부르고 악사들은 음악을 연주합니다. 
  효명 세자의 대표 작품으로 춘앵전이 있습니다. 이른 봄날 아침의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의 자태를 무용화한 것입니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꾀꼬리를 상징하는 앵삼을 입고, 양쪽 손에는 한삼을 끼고, 화문석(꽃돗자리) 위에서 추는 독무로 일반적으로 정재의 창사가 작품의 내적 주제나 상황을 표현한 것과 달리, 춘앵전의 창사는 추는 동작과 이를 바라보는 군왕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춘앵전의 춤사위는 상징적이고 시적인 용어로 은유적 서정성을 포함하고 있어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성상께서는 신이 백관을 삼가 거느리고 내년 정월 초하룻날 즉위하신 지 30년을 진하하는 예를 크게 거행하도록 허락하시고, 이어서 길신을 가려 축하의 술을 올리어 사순을 맞이하신 경사를 빛내게 하옵소서.’ 『순조실록』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재위 30년을 채운 임금은 세종과 영조를 포함하여 5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잔치를 위해 효명 세자가 순조에게 허락을 고한 것입니다. 그렇게 진행되는 순조의 사순 잔치는 왕실뿐만 아니라 국가의 큰 행사로 이 공연의 기획에서 무대 연출까지, 오늘날로 따지면 공연감독을 맡은 것은 효명 세자였습니다. 이 잔치를 위해 제주와 함경도를 제외한 여섯 개 도에 공문을 보내 기녀를 소집했으며 총 85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한양에 도착한 기녀들은 장악원에 여장을 풀고 여령들은 효명이 쓴 창사(궁중무용을 출 때 춤추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춘앵전」, 「무산향」과 같은 효명이 창작한 정재무가 20편 이상 늘어나며 익힐 악장도 더했습니다. 기녀들이 궁궐을 돌아다니니 이것에 대해 대신들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효명 세자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정재 연습을 꼼꼼히 챙겼습니다. 
  순조 대에는 세도정치의 시대였습니다. 정조는 죽으면서 평소 신임하던 김조순을 불러 당시 11살이던 순조를 부탁하였습니다.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 대신 수렴청정하며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정조의 유시를 받아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의 영향력을 커져갔습니다. 이로 인해 안동 김씨와 소수 양반 가문에 권력과 토지가 집중되고 삼정은 문란해졌습니다. 그리고 순조 9년에는 민심이 흉흉해져 홍경래의 난(1811)을 시작으로 여러 난이 일어났습니다. 순조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은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외척세력이었습니다. 이에 순조는 자신의 아들인 효명 세자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효명 세자는 할아버지 정조를 닮아 학문을 좋아했고 순조는 이러한 효명에게 외척세력에게 대항하던 김재찬을 스승으로 삼게 했습니다. 세자의 위상을 높이려 한 것입니다. 「왕세자입학도」는 세자가 만 아홉 살에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입학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세자 관련 기록화 중 효명 세자와 관련된 것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순조가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정치적인 의도입니다. 그리고 효명 세자가 열 아홉살이 되자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습니다, 
  ‘국가가 있으면 음악이 있으니 음악은 국가의 큰 절목이기 때문에 그 음악을 듣고서 정치를 관철하는 것이다. 내 보아하지 종묘제례 때 추는 춤 일무가 많이 어지럽고 어수선하다, 그 폐단을 빨리 바로 잡도록 하라.’ 『순조실록』


  예악정치는 조선의 역대 제왕이 한결 같이 추구하고자 한 노선이었습니다. 문물 정비의 일환으로 예와 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음악을 창제한 세종의 업적과 성종·숙종·영조대를 거쳐 정조대에 이루어진 예악의 재정비를 위한 여러 정책은 모두 예악정치를 이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 결과물이었고 대리청정을 하게 된 효명세자도 이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왕과 왕비의 탄신일, 설날이나 동지, 세자나 신하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큰 규모의 연향인 풍정이 매년 열렸습니다. 그러다가 선조 대부터 흉년 등 경제적 이유로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규모도 축소되어 영조 대에는 국가적인 것에서 집안잔치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83세까지 장수한 영조의 52년 재위기간에도 풍정보다 적은 규모의 연향인 진연이 단 11차례 이루어졌을 뿐이며 효명의 할아버지인 정조의 24년 재임기간에도 진연 한 차례와 검소한 진찬 네 차례만 치렀을 뿐입니다.
  이에 비해 효명은 대청기간 동안 11차례의 크고 작은 황제식 연향들을 주최하며 이에 쓰이는 악장과 치사, 전문과 정재를 직접 창작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연향에 쓰이는 악장과 치사는 당대 문신들이 창작했으나 이것을 효명이 직접 창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향에서 시행될 궁중 춤을 정비, 확충하고 연향을 관장했습니다. 조선조 말까지 전해지는 정재의 수가 53종에 불과한데 그의 대청기간 동안 총 40종의 정재가 추어지고 그중 26종의 정재를 직접 예제하거나 재창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효명세자의 예악정치는 세도정치의 번창하던 시기에 국왕이 중심이 되는 국가운영을 모색하기 위해, 궁중음악이나 무용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정치적인 안정과 단합된 국가의 모습을 지향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효명 세자는 파직시킬 수 있는 국왕의 고유권한을 이용하여 안동 김씨 세력 약화를 시도하였으며 비변사를 비롯해 정부 내 주요 요직에 외척이 차지하자. 효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소론 등 반외척 세력을 정계로 복귀시킵니다. 효명 세자는 신진 세력을 등용하기 위해 소수 유력가문 출신만 급제할 수 있는 과거제도의 부정과 비리를 혁파했으며 대리청정 기간 동안 50차례가 넘는 과거를 실시하여 전국 각지의 인재를 등용하려 했습니다. 효명은 또한 환재 박규수와도 만남을 가졌는데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근대 개화 사상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효명 역시 그와 만나 북학사상을 접했을 것이니. 그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순조 30년(1830) 윤4월 23일 밤 10시경 밤하늘을 가르며 유성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전날 밤, 효명은 한 달 넘게 앓던 호흡기 계통 진환 끝에 많은 피를 쏟았습니다. 그리고 5월이 되어서 효명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그의 병세에 현대에는 혹시 독살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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