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까지 표류하다 돌아온 문순득
2023. 10. 31. 07:3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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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송국 표류인을 송환시키라 명하다(命呂宋國漂人 送還本國).' 『조선왕조실록 순조9년(1809년)』
여송국이란 필리핀으로 조선에 표류한 필리핀인들이 돌아가기까지는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항해 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1801년 제주도에 표류한 5명의 필리핀들을 두고 조선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대화는 물론 필담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막가외(莫可外)"라 일컬으며 멀리 동남쪽을 가리키곤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사람 누구도 ‘막가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표류자들은 눈물만 흘렸습니다. 갑갑해진 조선은 이들을 심양으로 이송했으나 중국도 '알아낼 수 없다'며 돌려보냈습니다. 1807년에는 조선을 찾은 유구(琉球ㆍ오키나와) 사신들이 '여송국 사람 같다'고 추정했으나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는 군사적 사항이 아니면 수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에 표류하더라도 대부분 일정한 조사를 마치면 본국으로 보내 줬습니다. 특히 명이나 청나라의 사람들은 정말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배 굶지 말라고 식량과 여비까지 두둑이 챙겨줘서 보내 주곤 했습니다. 또 만약 배가 부서졌을 경우 배를 고치는 장비를 빌려 주거나 중요한 부품을 만들어서 스스로 떠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세종의 경우는 표류한 뱃사람들에게 원래 실었던 양의 쌀을 내려 주고 음식까지 잘 챙겨 먹여 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도 했습니다.
조선이 얼마 뒤 이들의 국적을 확실하게 알아냈습니다. 전라도 신안군의 상인 문순득(文淳得)이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덕분입니다. 결국 이들은 중국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상인 문순득은 어떻게 필리핀어를 알았을까. 역시 표류 때문입니다.
문순득은 25살 때인 1802년 1월18일 작은 아버지 등 5명과 함께 배를 타고 흑산도 인근 태도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일본 류큐까지 밀려갔습니다. 문순득 일행은 아홉 달이 지난 1802년 10월 중국을 향해 출발했지만 또 다시 표류해 11월 1일 필리핀의 루손(여송) 섬에 도착했습니다. 문순득은 필리핀 체류 8달 만인 1803년 9월9일 상선을 타고 마카오에 도착해 12월11일 광둥을 거쳐 1804년 4월14일 난징에 이르렀습니다. 1804년 5월19일 베이징에 다다라서야 조선 관료를 만나 귀국길에 오른 그는 1805년 1월 8일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문순득은 홍어를 사기 위해 거문도로 향하다 폭풍으로 배가 유구까지 떠내려가고 필리핀과 중국을 거치는 3년2개월의 여정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인물로 필리핀에 머물 때도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장사를 하며 현지어를 익혔습니다. 문순득의 표류기는 유배 중이던 정약전이 '표해시말'이라는 책으로 엮어냈습니다.
보통 『표해록』하면 탐진 출신의 최부가 남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 이외에도 몇 가지의 표류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순득의 이야기가 담긴 문순득표 <표해록>은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전라도 섬으로 유배 간 후 수많은 날을 바다를 보고 살다가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정약전은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으로 유배 온 것이었고 그의 집에서 문순득의 집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문순득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에 정약전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달음에 달려가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문순득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물이었습니다. 그는 ‘필리핀에선 남자가 밥을 짓고, 귀인은 숟가락과 세 끝이 뾰족한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말하는 등 뛰어난 기억력을 통해 두 나라의 풍속·궁궐·의복·선박·토산물 등을 상세하게 구술했습니다. ‘표해시말’ 말미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큐어(81개)와 필리핀어(54개)로 실리기도 했습니다.
문순득은 1801년 12월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바다에서 그만 표류를 당하고야 말았고 그들의 배는 유구국 즉 오키나와에 도착하게 됩니다. 유구국은 조선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던 곳이라서 그곳의 사신은 조선에서 3품의 항렬을 내려 줄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곳이라 표류인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선에서 표류한 사람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유구국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해 10월 초에 드디어 여송국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인 연경 진공사(燕京進貢使)일행과 함께 배를 띄웠으나 다시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풍랑을 만나 다시 표류를 하게 된 것이고 도착한 곳은 여송국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필리핀에 갈 수 있도록 한 자연적 혹은 기후요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겨울에는 계절풍이 북동풍을 따라 동남아시아까지도 충분히 항해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순득 또한 이 계절풍을 타고 갔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문순득이 유국국의 대도란 곳에 처음 표착했습니다. 이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대도는 지금의 가고시마현 아마미오시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미오시마에는 문순득이 착륙한 곳으로 전해지는 요로섬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이곳에는 표류민들을 관리하던 관청 터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표지판이 있어 8명의 관원들이 문순득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유구국에 조선인이 표류해오는 일은 워낙 흔한 일이었고 그에 따라 유구국이라는 사실은 문순득은 안심했을 것입니다.
1802년 문순득은 유구를 떠났습니다. 표류민은 귀환하기 위해선 중국을 통해야 했는데 함께 떠난 세 척 중 두 척이 부서졌고 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문순득은 다시 표류하다가 여송국, 지금의 필리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문순득이 도착한 여송은 필리핀 북부 루손섬의 릴로코스 지역으로 문순득은 여송에서 중국인 마을에 살았다고 합니다. 문순득은 그렇게 9개월을 어울려 살았습니다.
‘꼭 의자에 앉는 여송사람들은 상 한 가운데 밥 한 그릇, 반찬 한 그릇을 놓고 둘러 앉아 먹는다. 여송에서는 부엌을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두고, 남자가 밥을 짓는다. 개구리는 발과 배를 떼어내고 먹는다. 인사법도 별나서 어른을 만나면 손을 끌어다 냄새를 맡는다.’ 『표해시말』
문순득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여비를 말녀하기 위해 천을 짤 때 쓰는 실을 사서 노끈을 꼬아 팔았습니다. 장사를 한 것입니다. 문순득은 표류인임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현지말을 배워 현지 사람들의 삶과 풍속을 기록하였습니다. 문순득은 그런 면에서 당시 조선에서 보기 드문 세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순득은 1803년 지금의 마카오인 광둥 오문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마카오는 세계의 상선들이 모이는 국제도시였습니다. 오문의 관청에서 문순득을 불러 표류의 내막을 물었다고 합니다. 마카오에 들린 문순득은 마카오에서 유럽문화를 접한 최초의 조선인이기도 했습니다.
문순득의 표류이야기는 정약전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라는 호까지 지어주었습니다. 문순득의 표류이야기가 현대에 전해지게 된 데에는 양반이라는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적인 것을 학문대상으로 삼은 정약전에게도 그 공로가 있는 것입니다.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이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은 '경세유표'에 나오는 화폐개혁론도 문순득이 경험한 중국과 외국의 화폐제도를 본뜬 것으로 전해집니다.
‘지금의 동전 한 닢 무게로서 은전 한 닢을 주조하여 동전 50을 당하고, 또 은전 한 닢 무게로써 금전 한 닢을 지어서 은전 50을 당하게 하되 대중소 3층이 있도록 하면 3종류의 금속이 총 9종의 돈이 되는 바 참으로 9부환법이라 할 수 있겠다.’ 『경세유표』
정약전 사후인 1818년에는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제자 이강회가 우이도로 문순득을 찾아가 외국의 선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선박에 관한 논문인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썼으니 그의 표류이야기는 여러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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