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비를 쓴 이경석

2024. 2. 9. 09: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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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로 1639년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이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어 세운 비석입니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도중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땅에 묻혔다가 일제강점기 때 다시 세워졌으며, 광복 후 주민들에 의해 매립됐다가 1963년 홍수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삼전도비는 송파구 안에서 이전을 거듭하다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현 위치에 세워졌으나, 2007년 2월 삼전도비 철거를 주장하는 백모 씨가 붉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철거 370'이라는 글자를 적는 등 수난을 겪었습니다. 
  이경석은 조선 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할아버지는 이수광(李秀光)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이며, 어머니는 개성 고씨(開城高氏)로 대호군(大護軍) 고한량(高漢良)의 딸이라고 합니다. 이경석은 전주 이씨 덕천군파입니다. 덕천군(德泉君)은 조선 제2대 국왕 정종과 성빈 지씨 사이에 태어난 왕자로, 1444년(세종 26) 7월 덕원정(德原正)에 봉해졌다가 1460년(세조 6)에 덕천군에 봉해졌던 인물로, 당시 왕자들 가운데 학문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종친은 문·무관으로 관직 진출이 제한되었는데, 덕천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세조 집권 이후 국왕이 주관하는 시사(侍射)에 참여하거나 거둥에 동행하였습니다. 


  이경석은 어려서는 형 이경직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성장해서는 당대 대표적 유학자인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과거 급제 후에는 검열, 봉교를 비롯해 이조좌랑 등 당대 이른바 엘리트코스를 거치며 승승장구를 거듭하였습니다. 이경석은 인사를 담당하는 자리에 올라서는 당시에 만연한 당색(黨色)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후일 본인과 불화가 생긴 송시열 이외에도 송준길, 이유태 등 당대 대표적인 학자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관직 진출 후 이경석은 문명(文名)을 날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후일 논란이 된 삼전도비(三田渡碑;본래 이름은 청태종공덕비)의 비문을 짓게 되었습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국왕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장소에, 청나라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비문을 세우니 그것이 이른바 삼전도비입니다. 전쟁이 종결된 지 2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청나라에서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자리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울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비록 항복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청나라는 오랑캐요, 명나라만이 중화(中華)로 생각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비문을 지으려 하지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청나라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인조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장가 조희일도 일부러 글을 거칠게 지어 채택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인조는 결국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청나라 조정에 보냈고, 결국 청나라에서 이경석의 글을 지목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과정에서도 청나라는 딴지를 걸었습니다. 
  ‘장유의 글은 인용문이 적절치 않아 채용할 수 없고, 이경석의 글은 너무 소략해서 고칠 곳이 많다.’ 『심양장계』
  장유는 효종비인 인성황후의 아버지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이었을 정도로 글 솜씨가 빼어났습니다. 그런 그가 채택되지 않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인조는 이경석을 설득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 능했고, 영의정까지 올랐던 이경석은 어쩔 수 없이 삼전도비의 글을 쓰면서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며 피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사실 그럴만도 한 것이 항복의 상징인 비문을 쓰는 것도 참담했지만, 병자호란 때 쳐들어온 청나라는 더러운 오랑캐라 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조선은 그 때까지 여진족 사람들를 개 혹은 돼지라고 부르며 무시했으며 아이들마저 청 사신에게 돌을 던지며 욕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나갈 때 관중이 길을 메웠는데 여러 아이들이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며 욕을 하기도 했다.’ 『인조실록』
  하지만 이러한 오랑캐는 칭송하는 비문을 찬술하라는 것도 곤욕이었습니다. 사실 인조 입장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비문은 자성해야 했습니다. 당시 청 태조는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 경우 인질로 세운 아들(소현세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여 비문을 작성해야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삼전도비와 관련한 병자호란은 이미 예견된 전쟁이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힘을 잃은 명나라는 몰락하고 있었고, 그 사이 후금이 세력을 뻗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조선에 대해 군신 관계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조선은 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전쟁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세계관이 지배한 조선에서 주화론을 꺼내기도 어려웠습니다. 척화파의 목소리는 12만 청나라 군대에 둘러싸인 남한산성에서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식량은 줄고 인조는 침구도 없어 옷을 입은 채 잠들었습니다. 임금의 수라도 초라했습니다. 청도 이러한 사정을 알았습니다. 청나라가 항복을 권유하는 상황에서도 척화파는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명분과 의리를 지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어서 그들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용포는 착용할 수 없다. 죄를 지은 사람은 정문을 통해 나갈 수 없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5일째 되는 날, 인조는 성을 나서 임금의 옷 대신 신하의 옷을 입고 정문인 남문이 아니라 서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1637년 1월 30일 삼배구고두례가 행해졌습니다. 삼궤구고두례는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를 대면할 때 취하는 인사법으로 이 의식은 명이 아니라 청이 천하의 주인임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청이 돌아간 후 조선의 백성 50만 명도 끌려갔습니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돈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른바 속환으로 돈 있는 자는 데려올 수 있었으나 가난한 백성들은 그게 힘들었습니다. 이때 이경석은 국고를 열어 백성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와서도 여인들에게는 환향녀라 하여 청나라에 잡혀갔던 여자들은 홍제천 맑은 물에서 목욕을 하면 몸이 깨끗한 것으로 인정받는다는 말도 돌았습니다. 하지만 환향녀들이 나은 자식들에 대해 벼슬길을 허락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이때 이경석은 포로로 잡혀간 것은 개가한 것과 다르므로 그 자손의 벼슬길을 막듣나는 것은 가혹하다‘고 반박했고 인조도 이경석의 말을 따랐습니다.
  이경석은 효종이 즉위하고 성곽 수리를 하고 병사를 훈련시킨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막아선 것도 이경석이었습니다. 이경석은 이 일로 영의정으로서 책임을 지고 귀양길을 갔습니다.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던 것입니다. 
  이경석은 현종 9년(1668년) 11월 27일 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습니다. 이것은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였습니다. 궤장은 국가를 위해 자기 몸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다는 것을 군주가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분론자들은 이경석을 비판하기도 했고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송시열입니다. 송시열은 ‘수이강(壽而康)’이라 하여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뜻으로 송나라의 손적이 흠종을 따라 금나라에 잡혀간 뒤 오랑캐에게 아부해서 말년에 부귀를 누렸다는 내용의 고사입니다. 그런데 송시열은 이경석이 천거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경석을 ‘겉으로는 덕이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았으나 실제 행실은 그렇지 않은 소인배’라는 의미의 향원(鄕愿)이라고 폄하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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