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
2024. 3. 9. 09:2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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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는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한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대표할만한 예술가라 할 수 있습니다.
‘고금의 화가들은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는 못하였다. 단원은 못하는 게 없어 그와 대항할 사람이 없었다.’ 『표암유고』 단원기
김홍도의 출생연도와 고향은 분명하지 않으나 경기도 안산에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곳에 당대 최고의 화가 강세황이 살았으며 이집에 김홍도가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화서 화원이 김응환이 강세황을 찾아왔습니. 도화서에 일손에 부족하여 후배로 가르치며 데리고 있을만한 인재를 추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세황이 그림 몇 점을 보여주니 오히려 김응환은 자신이 가르칠 수준이 아닌 것 같다라며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강세황은 해당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자네보나 서너살은 어릴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김응환이 십대에 도화서에 들어갈 정도로 천재였는데 강세황의 대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길로 김홍도는 도화서의 화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1773년, 김홍도는 세손 이산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세손은 김홍도보다 일곱 살이 적었지만, 다음 임금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정조입니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지가 오래다. 삽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김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홍재선서』
김홍도는 세손의 초상과 영조의 어진까지 그리는 어진화사가 되었고 영조는 그 공을 인정하여 김홍도를 종 6품 사포서 감목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스승인 강세황에게도 벼슬을 내렸습니다. 김홍도가 임금의 칠순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렸을 때 불과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김홍도의 실력은 젊은 나이에 이미 화원계에서 최고로 평가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홍도는 도화서의 대표 화가로서 모든 그림 작업을 주도했습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규장각 그림을 그려 바쳤고, 궁궐의 모든 행사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김홍도가 유독 잘 그린 것은 신선도였습니다.
어느 날, 정조가 하얗게 회칠을 한 궁궐 벽 앞에서 김홍도에게 신선을 모습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임금의 명을 받아도 구상과 준비에만 며칠이 걸릴 일이었지만, 김홍도는 그 자리에서 관모까지 벗고 바로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나절도 걸리지 않아 완성된 그림은 「해상군선도」였습니다.
한편 정조의 명을 받아 김홍도는 거리에 나가 백성들의 삶을 소상히 알 수 있는 그림을 그려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정조는 어명 이후 거의 10년간 풍속화를 그렸고 이 때의 탄생한 작품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씨름도」, 「서당도」, 「벼 타작」, 「무동」, 「대장간」, 「기와 올리기」 같은 풍속화들이었고 이런 그림을 모은 <<단원풍속도첩>>은 보물 52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김홍도의 뛰어난 기량에 감탄을 금치 못하여 그림을 구하려는 자들이 무리를 지었다.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사람들이 문을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 -강세황, 『표암유고』 단원기
1788년 정조는 금강산과 관동의 명소를 화폭에 담아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김홍도와 김응환은 금강산으로 떠났고 스승 강세황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세황의 아들이 금강산 근처의 고을 수령을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그린 그림들인 「명경대」, 「청심대」, 「진주담」 등이었고 강릉 쪽으로 나와서 「총석정」, 「경포대」 등 관동팔경의 명소를 그렸습니다.
정조의 명으로 일본과 중국까지 다녀온 김홍도는 충청도 연풍(지금의 괴산군 연풍면) 현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조의 명에 따라 연풍 주변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옥순봉도」, 「사인암도」, 「도담삼봉도」같은 작품들이었고 나중에는 「병진년 화첩」을 만들어냈습니다. 현감 김홍도의 첫 관료행적은 연풍현 안부역(현재 충주 대안보 마을) 화재였습니다. 지리상으로 중요한 안부역에 화재가 발생한 만큼 현감 김홍도는 화재 사후 처리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현감 김홍도가 봉직하던 1793년과 1794년은 연풍을 포함한 삼남지방에 큰 기근이 연이어 일었습니다. 부임 첫해인 1792년에도 가물었는데 뒤이은 두 해 역시 농사 작황이 매우 좋지 않아 아민(餓民)이 속출함으로써, 각도에는 조정으로부터 위유사(慰諭史)가 연이어 파견되고 감사들은 필진장계(畢賑狀啓)를 올리느라 분주하였습니다. 당시 안부역 화제에 대한 사후 처리, 기근에 대한 구휼 등 현감 김홍도의 관료행적은 『일성록』에 상세합니다. 김홍도 연풍현감 시기의 주요 사건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해 무난한 중고(中考)의 평가를 받았으므로 그가 현감에 부임한 후 1749년 3월까지의 정사(政事)는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홍도은 탄핵 당했는데 사유는 중매나 행하고 노비와 가축을 상납케 하고 사냥이나 즐겨 원망과 비방이 자자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김홍도의 이러한 사유는 죄가 될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한편 김홍도에 대해 이론의 유명한 화가 도슈사이 샤리쿠와 동일 인물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 그림으로 일컫는 그림이 '우키요에(浮世繪)'로 이런 우키요에 그림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사람이 도슈사이이 샤라쿠라고 합니다. 하지만 샤리쿠의 그림과 김홍도의 그림을 비교하면 필치와 기법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샤리쿠라는 사람은 일본에서도 유명한 가장 일본적인 우키요에 판화 하가로서 일본 연극배우들의 얼굴을 희화한 판화들을 그렸으며 이는 아무리 천재 화가라도 잠깐 몇 개월 만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김홍도가 한 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1787년 일본은 막부장군이 도쿠가와 이에나리로 바뀌는 과정이었습니다. 보통 막부장군이 바뀌면 조선에 통신사를 파견을 요청해왔는데 오랫동안 통신사 요청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조는 일본의 동태가 궁금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정황을 파악하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료를 얻기 위해 역관들을 중심으로 대마도에 김홍도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기도 화성에 용주사가 있는데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절입니다. 사찰의 중심이 되는 대웅보전 법당에는 특별한 그림 한점, 후불탱화가 있습니다. 가로 3.5m, 세로 4.4m의 대형 통비단에 그려진 이 불화는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불화와 달리 하단 중앙에 축원문이 적혀 있는데 왕과 와의 어머니 자궁, 왕비와 세자의 장수를 기원한 것으로 후불탱화가 왕실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후불탱화를 그린 이가 바로 김홍도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화승들의 전유물인 불화를 과연 김홍도가 그렸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불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손이나 옷 선의 처리 등을 볼 때 김홍도의 필치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서양화법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한 때는 김홍도의 그림이 아니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국가 공식 문서 「수워지령등록」에는 김홍도가 불화 제작을 총감독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체적으로 불화 연구자들은 김홍도설에 부정적이며, 일반회화 연구자들은 김홍도설을 지지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홍도는 조선을 대표할 수 있는 천재화가였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하면서 그의 말년도 쓸쓸했습니다. 따라서 언제 생을 마쳤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지 않았고 「추성부도」라는 다소 쓸쓸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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