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공노비 해방

2024. 3. 26. 07:0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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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손 기자가 찍은 서울의 기생.

  순조 원년(1801) 정월에 단행된 내시노비 해방은 16세기 이래 진행되어 온 공노비제도의 동요 현상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지만, 이는 1894년 노비제 폐지로 마무리되는 19세기 노비제 해체의 역사의 단초를 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때 내노비 36,974명과 시노비(각사노비) 29,093명 등 도합 66,067명의 내시노비가 해방되었습니다. 내시노비가 공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조선 후기의 실정을 감안하면, 내시노비 혁파는 사실상 공노비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조치에서 제외된 각관노비도 지방 관아의 공역을 담당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노비조차 확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크게 줄어 들고 있었습니다. 내시노비 해방의 결과 19세기 노비제는 내부 구성의 면에서 이전 시기의 노비제와는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공노비는 형식적으로는 국가, 내용적으로는 국왕의 개인 재산이었습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나라 풍속에 따르면 내노(內奴·왕실 재산을 관장하는 내수사의 노비)·사노(寺奴·중앙 관청 소속 노비)·역노(驛奴·역참 소속 노비)·교노(敎奴·향교 등 교육기관 소속 노비) 등의 부류는 공천(公賤)이라 하고, 사족(사대부)과 서민의 노비는 사천(私賤)이라 한다”고 썼습니다. 공천은 공노비고, 사천은 사노비로 1801년 순조가 해방한 왕실과 관아 소속 공노비 6만6067명이 바로 공노비입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시노는 온종일 뜰 위에 서서 상전의 명을 기다려야 했고, 수노는 관청에서 소요되는 물건을 사들였다. 공노는 관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고, 구노는 말을 기르면서 원이 나들이할 때 양산을 붙잡고 따라다녔다. 방노는 방을 따뜻하게 하고 변소를 돌보는 일을 했으므로 방자라고 불렀다. 관노들 가운데 보수를 받는 자는 부엌에서 일하는 포노와 주노, 창노뿐이다”라고 안타까운 지방 관노들의 노역 실태를 그렸습니다.
  한편 조선 정조에 대해 노비 해방을 위해 오랫동안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해 1801년(순조 원년) 공노비부터 해방을 단행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성군이었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정조대왕이 살아 계셔서 그 일이 실제 진행됐다면 미국의 게티스버그 연설보다 60여 년이나 앞서 노예 해방을 실행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는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비록 순조 대에 공노비 해방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본래는 정조 대부터 논의가 이루어진 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노비 문제는 조선 초기부터 논의가 되었던 문제라고 합니다. 바로 노비 숫자를 줄이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기에 따라 종부법이나 종모법을 채택했는데 여자노비가 많으면 종부법을, 남자 노비가 많으면 종모법을 채택하여 노비의 전체 숫자를 줄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영조 7년(1731년)에 이르러서는 조선왕조는 종모법을 택했고 이는 어머니가 노비인 경우에만 그 자식을 노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집 중 ‘연소답청’. 18세기 한양 양반가 자제들이 기생을 동반해 꽃놀이 행락에 나선 모습이다.


  조선 정부가 노비 숫자를 줄이려 한 것은 조세수입과 병력충원을 늘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1801년 당시에는 이미 공노비의 숫자가 격감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노비의 격감을 초래한 주요 요인들로는 노비의 도망이나 양인과의 혼인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군주의 은혜로 이러한 조처가 이루어졌다기보다 노비계층의 사회·경제적 성장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17, 18세기 호적대장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공노비의 신분변동을 고찰한 역사학자는 공노비들의 지위 상승이 양천교혼(양인과 노비의 혼인)의 증가를 불러왔고 이것이 공노비제도 해체의 주요 요인이었다고 했습니다. 호적대장에 근거하여 17세기까지 30% 내외였던 양천교혼이 18세기에는 약 60%로 격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는 거의 모든 노비들이 양천교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양인과 결혼하는 노비가 많아졌다는 것은 노비 계층이 경제적으로 생장했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경제적 지위도 올라갔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것은 양천교혼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1801년 공노비 해방 이전에도 조선은 신분을 상승시킬 기회를 제도적으로 마련했습니다. 바로 정부에서 시행한 납속책입니다. 납속책은 조선시대 군량(軍糧) 등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거나 또는 흉년 ·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목적으로 백성에게서 곡물과 돈을 받고 국가가 납속에 응한 자에게 일정한 특전을 부여한 정책입니다. 납속은 조선 전기부터 있었지만, 대상은 노비에게만 국한되었고, 그 액수도 후기에 비해 상당히 많은 액수였고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납속이 제도화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를 모으는 과정에서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궁궐 ·성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재정과 물량을 확보하려고 계속 실시하였습니다. 서얼과 향리층은 양반사회의 자기도태 작용으로 밀려난 계층이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납속책을 통해 신분상승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를 통한 신분상승은 서얼과 향리에 한정되지 않고, 천인의 경우에도 재력만 있으면 일단 속량(贖良)했다가 다시 양반으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정부가 재정적으로 곤란에 빠질 때마다 강제로 발매한 공명첩은 재력 있는 비양반층이 양반신분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공노비의 공불 부담액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1년에 노(奴)는 면포 2필, 비는 1필 반이었습니다. 그러더니 현종 대에서는 노는 1필 반, 비는 1필로 감액되었고, 영조 31년에는 노와 비에게 각각 반필을 줄여주고, 동왕 50년에는 비의 공물 부담을 전액 감해줘 노만이 양정(良丁)과 같은 1필의 신공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신공에 관하여 양인과 천인의 부담은 동일하게 되었습니다. 노비의 신공이 줄었다는 것은 국가 재정의 악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노비층에게 양인층으로 신분이 오르는 것을 허락하여 그들이 역을 피해 달아나거나 숨는 것을 막고 재정확대를 꾀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실제로 노비들이 줄어든 이유에는 도망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도망하여 역을 피하는 노비를 신고하는 자에겐 여섯 명마다 한 명을 상으로 준다’는 『속대전』의 내용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문서에 등록된 노비 19만여 명 중 신공을 거둘 수 있는 노비가 2만 7000여 명이 불과하다’는 『증보문헌비고』 호구고 부노비 조의 기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노비를 양인으로 만들어 주어 그들이 사회적으로 멸시받거나 천대받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의 도망을 막거나 숨은 노비에 대한 신고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1904년 밀입국한 스웨덴 아손 기자가 남긴 140여 컷 중 말을 탄 양반을 모시는 노비의 모습.


 한편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정약용은 노비 종모법을 실시한 이래 노비가 감소하자 이를 비판하며 오히려 그 이전의 악습인 일천즉천(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조선 시대에 노비제 완화를 주장한 측은 서울 경기 지역에 터 잡은 서인 계열이었고 지방의 군소 지주인 남인들은 격렬히 반대하는 양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저서 『목민심서』 변등조에서 임진왜란 때에는 사족들이 많은 노비들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홍경래의 난 때는 한 집에 한 사람의 노비도 낼 수 없어서 의병을 조직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이러한 것은 영조7년(1731년) 노비의 양인 처 소생은 모두 양인으로 하는 종모종량법 실시했기 때문이 일어난 것이고, 옛 노비법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유형원은 종모종량법을 실시는 하되, 공로와 재능 있는 자에게 특권을 주어 면제되는 길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노비의 숫자를 줄여나가고자 하였으니 이는 정약용의 사상에 비해 진전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유형원이 신분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익도 노비 소유를 100명으로 제한하여 그 이상과 5세 이하의 노비는 양인화하고자 하였는데, 거기에는 노비 스스로가 관에서 정한 가격을 부담하면 해방하는 조건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생각들은 인권적인 측면보다는 양역을 부담해야 하는 양인층의 감소로 인해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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