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제일의 홍역전문의 이헌길
2024. 4. 6. 09:2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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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주기적으로 조선을 휩쓴 공포, 그것은 전염병이었습니다.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백만에 이르고 심지어 한 마을이 모두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조선왕조실록』, 1671년
‘전염병이 서쪽에서부터 일어나 여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팔도에 만연해 사망자가 거의 50, 60만이나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1749년
나라에서는 민심 안정을 위해 역귀를 달래는 여제를 지낼 뿐. 전염병 앞에 조선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홍진(홍역)이 극성을 부려 요절하는 우환이 많다.’ 『조선왕조실록』, 1775년
이 일로 한양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몽수 이헌길이었습니다. 볼일을 보고 성문을 나서는 참이었습니다. 수레에 실린 관(棺)과 지게에 얹힌 시신이 줄줄이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어림잡아도 100여 명이 되었습니다.
“내가 저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 상중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떠나는 것은 어진 마음이 아니지.”
그는 발길을 돌려 서울 시내 친척 집에 머무르며 의술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헌길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장천(長川) 이철환(李嚞煥)에게 학문을 배우고 널리 책을 읽었습니다. 조선 제 2대 왕 정종의 후손으로 유학자였던 몽수 이헌길은 의원을 찾을 여유가 없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직접 홍역 치료에 나섭니다.
‘그는 친척 집에 머물면서 자신의 비방으로 많은 이들을 치료해내어 수십 일 만에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정약용 『마과화통』
그럼 홍역은 어떤 병일까. 조선시대에 홍역(紅疫)은 마진(痲疹)·홍진(紅疹)·당두역(唐痘疫)이라고도 불렸는데, 두창(痘瘡), 즉 천연두 등과 함께 조선시대 영유아의 사망률을 높였던 주요 질병 중 하나였습니다. 홍역은 ‘평생 안 걸리면 무덤에서라도 걸린다’는 속담처럼 계층,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질병이었는데, 특히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크게 위협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홍역이 발생하면 옥중의 죄인을 풀어주거나 각종 행사를 중지하였고, 반대로 쾌차한 후에는 대사면을 단행하거나 축하연을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민간에서 홍역이 대규모로 유행했던 정조대에는 홍역의 치유 의례로서 국행 의례인 여제(厲祭)를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홍역의 질병사에 대해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을 인용하여 "마진이란 병은 옛날에도 있었으나 1613년(광해군 5)에 당두역이란 것이 유행되었는데 일명은 홍진이고 세속에서는 홍역이라 한다. 크게 유행되기는 1668년(현종 9)부터였다."고 그 유래를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요즘에 와서는 또 홍진이란 역질이 있는데 이는 널리 퍼진 지가 아직 백 년이 차지 않는다."라고 하여 원래 존재했던 질병임은 확실한데 다만 17세기 후반부터 심각한 전염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림병으로 수구문 밖에 시체들이 겹칠 정도…….’ 광해군 5년(1613년)
어린이가 많이 사망하여 거리에 아이가 드물었다.‘ 숙종 33년 (1707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오늘날보다 훨씬 짧은 24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홍역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17~18세기에는 거의 3년에 한 번 꼴로 전염병이 찾아와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 시기에 역병이 창궐했던 첫 번째 이유로 전 세계적인 소빙기 기후의 탓을 들 수 있습니다. 지구의 이상 기후는 생물의 성장에 장애를 가져왔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대기근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백성들에게 공급되는 영양도 질이 떨어졌습니다. 면역력은 떨어지고 위생 상태는 나쁜 데다 균이 창궐하자 피해는 더욱 컸습니다. 그리고 당시 역병이 창궐했던 두 번째 이유로 잦은 국제교류를 들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한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먼저 발생한 뒤, 순차적으로 일본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구의 도시 집중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17~18세기, 여러 이유로 농토를 떠난 유민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한양의 인구는 늘어났고 그 때문에 위생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당시 역병이 돈 것은 대내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홍역은 창궐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마진같은 전염병이 돌면, 의료 기관이었던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활인서 중 특히 혜민서에서 백성들의 치료를 전담하고 활인서에서 병막을 지어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수용하여 치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피난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면역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도, 한 번 걸린 사람은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열이 발생하는 초열, 진이 돋아나는 출진, 진이 떨어지는 수진, 홍역 발병 과정을 3단계로 분류해 환자별 증상을 파악하고 열독 배출에는 승마갈근탕, 회충 치료에는 이피삼육탕을 처방하는 등 이헌길의 독창적인 치료법은 처방 즉시 효과를 보였습니다. 이헌길이 살던 시기에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홍역이라는 병의 정체도 천연두를 가리키는 두창과 혼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홍역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부족했습니다. 이는 『동의보감』에서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적절한 치료법이 없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이헌길이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던 것은 증세별 대증요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명성도 높아져 몽수가 문을 나서면 수많은 남녀가 앞뒤에서 옹호하였는데 마치 벌떼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에는 먼지가 하늘을 가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이몽수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홍역은 돈이 되지 않아 의원들조차 연구를 꺼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헌길은 『마진방』, 『을미신전』 등 홍역에 대한 처방 모음을 기록하고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치료법을 개발해 의술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홍역 치료에 있어 조선제일의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다산은 어렸을 때 홍역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이헌길의 치료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헌길의 은혜를 갚고자 ‘마진기방’을 다시 깊이 검토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이란 저술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곧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사(醫學史)의 명저는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계승, 발전시킨 것입니다.
당시에는 의학은 의원들만의 학문이 아니고 유학자들도 공부했습니다. 유학자들이 의학 공부를 했던 것은 단순히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학문을 연마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역대 왕들도 의서 간행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이헌길도 애민정신을 실천하는 유교의 도리에 따라 의학을 공부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그의 스승으로 이철환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조선시대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이익은 17세기 실용주의 학문을 강조하며 조선사회에 새로운 지식체계를 정착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진(홍역) 역시 그의 연구 분야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익의 실용주의 학문은 이철환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철환 역시 실용학문에 능해 『물보』라는 백과사전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교류의 결과로 이헌길 역시 홍역에 매진할 수 있었고 홍역이 조선에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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