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2024. 3. 26. 09:2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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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재위 1724~1776)는 조선의 제21대 왕입니다.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53년) 왕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복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신하들은 편을 나눠 심하게 싸웠습니다. 
  영조는  당쟁에 민감했습니다. 경종과 영조는 숙종의 아들입니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 훗날의 경종이고, 영조는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입니다. 숙종 때는 서인과 남인 간의 다툼이 치열했고, 서인은 인현왕후를, 남인은 희빈 장씨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7년이 지나도록 인현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고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에 남인의 세력이 커졌는데 숙종은 이에 부담감을 느껴 갑술환국을 일으켜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중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사가로 보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희빈 장씨는 6년간 자리를 지킨 왕비의 지위에서 후궁으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서인은 숙종이 죽으면 희빈 장씨의 남인 세력이 득세할 것을 우려, 숙빈 최씨와 그가 낳은 아들 연잉군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서인은 내부에서 분열이 나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노론은 연잉군을, 소론은 경종을 지지합니다. 인현왕후가 죽고 그 자리를 희빈 장씨가 차지할 것을 우려한 노론은 상소를 올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하여 사약을 먹게 합니다. 이후에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노론은 조용히 있어야 했습니다. 경종이 희빈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종은 병약하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에 노론은 경종이 후사가 없으므로 동생인 연잉군에게 왕세제로 책봉하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경종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왕위 계승은 조선 역사에서 이례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였는데 이에 따라 독살설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 때도 언급되면서 영조의 재위 기간 내내 정통성과 관련한 아킬레스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숙빈 최씨의 출신이 미천하다는 것이 영조의 뒤를 따라다니며 콤플렉스로 작용하였습니다. 영조는 ‘어제대훈’(1741)이라는 책에서는 자신이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이른바 ‘삼종혈맥’을 내세우며 정통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이때 자신의 정통성에 시비를 거는 소론의 세력이 아들 사도세자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고 의심해 그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영조는 이를 후회하며 당파가 아닌 인물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균역법 등 국정 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과 문물 정비에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신체에 고통을 주는 압슬형, 낙형 등 잔인한 형벌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1751년 9월 시행된 균역법에 따라 양인이 군복무 대신 해마다 부담해야 할 세금이 포2필에서 1필로 줄어들었고 물 흐름이 자주 막혀 범람하기 일쑤였던 도성내 하천의 준설공사도 펼쳤습니다. 준설이란 개천 바닥에 쌓인 흙을 퍼내는 일이었습니다. 영조가 청계천 준설을 하게 되면서 청계천 범람이 줄었고 전염병이 줄었습니다. 전염병이 줄자 한양의 인구는 폭증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니 상업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때 왕이 된 사람이 정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조와 정조(재위 1776~1800) 두 임금의 시대를 ‘조선후기 중흥기’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영조 47년(1771) 왕의 지시로 신문고를 다시 설치했는데, 영조가 조선 초기에 신문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문고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다산 정약용은 신문고에 대해 “북이 대궐 안에 있어서 들어가기가 어려우므로 서울의 양반이나 칠 수 있지 시골의 천한 백성은 그 북을 만져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영조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가 탕평책입니다. 이 때 ‘탕평’은 유교 경전인 ‘서경’의 ‘왕도탕탕 왕도평평’에서 따온 구절입니다. 쉽게 말해 당파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왕의 의지를 뜻합니다. 영조는 신하들과 여러 당파가 협력하자는 탕평책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탕평채를 음식상에 내놓았고, 그 뜻을 이뤘다고 ‘조선 요리학’에 전해집니다. 탕평채는 청포묵에 고기볶음ㆍ미나리ㆍ김 등을 섞어 만든 묵무침으로 공교롭게도 탕평채 재료의 4가지 색깔은 조선 시대 붕당 정치를 펼쳤던 사색당파인 노론(동인)ㆍ소론(서인)ㆍ남인ㆍ북인을 상징한다고도 합니다.
  영조는 즉위 과정과 즉위 후에 왕위 자체를 부정당하는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한 후 국왕이 중심이 된 ‘황극탕평’(皇極蕩平)을 추진하며 균역법 및 준천(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파내는 것)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영조는 글 정치뿐 아니라 미술을 통한 이미지 정치에도 탁월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화원화가 김두량이 그린 ‘삽살개’(1743)에 쓴 어제시입니다. 김두량이 47세에 그린 이 그림은 서양화의 사실주의 기법의 영향을 받아 개의 털 한 올 한 올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화면 가득 그려진 삽살개는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는데 영조는 이 그림에 이례적으로 손수 시를 지어 써넣었습니다.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가 맡은 임무거늘, 어찌하여 길에서 대낮에 이렇게 짖고 있느냐.”
  이 그림은 영조가 노론 중심의 사헌부와 갈등하던 시기에 그려졌는데, 당시 사헌부는 영조의 국왕중심 정치를 비판했습니다. 영조가 쓴 글귀로 보건대,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낸 삽살개는 영조의 탕평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조는 첫 아들을 1719년에 얻었고 생모는 후궁 정빈 이씨인 효장세자였습니다. 영조가 즉위한 1724년에는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고, 그 다음해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1727년 조문명의 딸과 가례(혼인)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1728년, 영조가 35살이던 해에 갑자기 병에 걸려 9세의 어린 나이에 단명했습니다. 영조는 친히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효장세자는 '효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세의 나이에 청상 과부가 된 현빈 조씨는 이후 죽을 때까지 영조의 병수발을 들면서 홀로 살아야 했는데 영조는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732년 영조는 다시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바로 사도세자였습니다. 영조는 급한 마음에 사도세자가 세 살이 되자,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상당히 이른 편으로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기대감이 컸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도세자는 영특하여 영조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고 합니다. 영조는 종종 세자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공부한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세자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할 때가 많아지자, 영조가 엄히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럴수록 세자는 점점 위축되어 갔습니다. 영조는 나름 능력 있는 인물이었지만, 세자의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것은 세자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성장하면서 학문보다는 무예에 관심을 가졌으며 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는 사도세자가 지은 『무기신식』이란 책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자는 늘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 위축되었고, 부자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영조 25년 1월 27일,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합니다. 영조 31년에는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납니다. 나주 객사에 걸린 한 장의 괘서에 영조와 노론세력을 비방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범인들은 나주에 유배되어 있던 윤지를 비롯한 소론계 강경파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노론세력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시도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은 그 동안 탕평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소론은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세자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노론은 이 기회로 소론을 제거하려 했지만, 세자가 이에 따르지 않자 노론은 세자의 정치적 입장을 의심하였습니다. 이는 세자에 대한 노론의 정치적 공세로 이어졌고 영조에게도 부담으로 작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멀어진 부자관계는 임오화변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뛰어난 군주였음에도 아버지로서는 글쎄라는 의문을 달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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