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구한 여인 김만덕

2024. 3. 19. 09:2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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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덕은 1739년, 제주 성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본디 양인이었으나 부모를 잃고 12세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김만덕은 외삼촌 집으로 가서 일하며 겨우 목숨을 이었는데, 외삼촌이 죽자 외숙모에게 매일 중노동에 학대를 당하다가 부자 제주 기생 월중선에게 돈 몇 푼에 팔려갔습니다. 월중선은 한눈에 어린 김만덕의 훤칠한 미모와 단정한 성품이 마음에 들어 기녀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기생은 국가에서 소속된 공노비로서 관아의 재산으로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김만덕은 퇴기의 수양딸이 되면서 생계는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김만덕은 예능적 재능을 발휘하여 제주에서 부와 명성을 떨쳤습니다. 『감은편』에 따르면 "자색이 있어서 부에 속한 기생으로 뽑혔고 기예를 배울 때 무엇이나 다 잘했다"고 김만덕의 미모와 재능을 기록하는가하면 한편으로 "성격이 활달하여 대장부의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고도 평했습니다. 하지만 김만덕은 양모의 신분을 물려받아 천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김만덕은 결국 기생의 수양딸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으나 김만덕은 기녀가 천시받는 직업이라는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녀 노릇을 할망정 기녀로 자처하지는 않았다.’ 채제공, 『만덕전』
  그리고 그 신분을 벗는 것이 시급했고 제주목사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끈질기게 설득해 본래의 양인신분을 되찾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결정에는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주의 기녀는 천민 신분이었으나 그 세력이 굉장했다고 합니다.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는 『지영록』에 “(관리들이) 총애하는 것을 믿고 건방져서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며 보통 일도 기녀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록하였으니 그에겐 엄청난 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만덕이 눈길을 돌린 곳은 상업이었습니다.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장사를 했던 부친에 대한 기억과 관기로 있으면서 터득한 식견을 바탕으로 이 분야에 뛰어든 것입니다. 
  김만덕이 상업에 뛰어들었던 18세기 후반에는 내륙에서는 5일장이 서면서 활기를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전국 물산의 이동을 도운 것은 보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포구는 당시 교통과 유통의 중심지였고 제주에는 귀한 특산품들이 있어 육지로 나갈 일이 있었는데 섬이었던 제주에 포구는 상업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김만덕이 장사를 시작한 품목은 바로 쌀이었습니다. 제주 출신인 김만덕은 척박한 지역으로 농사가 어려운 특성상, 쌀이 귀했던 제주의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번암집』에 따르면 김만덕은 '재화를 늘리는 데 재능이 있어서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내어팔거나 쌓아놓곤 했다'고 기록하며 그녀의 장사 수완과 통찰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김만덕은 수입만이 아니라 양반들이 이용하는 갓의 재료가 되는 말총과 양태 등을 육지로 수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제주도의 말총과 양태는 갓의 재료로 최상품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었고, 18세기 들어 조선의 상업과 상인계층이 크게 번성하며 돈으로 양반 지위까지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화려한 양반의 복장은 이른바 당대의 패션 아이템으로까지 진화했습니다.
  육지의 일부 상인 집단들은 제주도의 특산품을 매점해 육지에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이득을 남겼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개성상인들이 갓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양태를 매점해 전국에 직접 독점 판매한 경우로 제주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인 양태는 보통 해남이나 강진 등지에서 모아져 육지의 중간 상인들에 의해 서울 시전에 전매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성상인들이 양태를 직접 매점해 판매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한 것인데 이 때 김만덕이  제주도에서만 나는 특산품을 육지에 내놓아 판매하고 제주도에서는 나지 않는 물품을 육지에서 사 들여와 판매한다면 자신이 독점적인 시장 지배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김만덕은 산지천 동쪽 금산기슭에 객주를 차렸는데 객주는 숙박업 역할도 했지만 외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거간하는 매매중개상 역할도 했습니다. 제주에서 난 물건이 강경까지 가려면 주나 영암에 도착해 말을 타고 가야 했지만 이러한 방법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많은 물자를 실어나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김만덕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물길이 험한 칠산 앞바다를 거쳐 강경까지 직접 물건을 운반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방식은 물품을 대량으로 싼 가격에 유통시키는 것을 가능케 해서 김만덕 상단의 경쟁력을 더해갔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김만덕은 선상을 유치했고, 창고와 선박까지 소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규모도 커지고 이윤도 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만덕은 만족하지 않고 더욱 사업을 확장하였습니다. 상품거래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금을 제공하는 금융업과 창고시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를 대여하는 창고업까지 사업을 벌이며 확장시켰습니다. 
  ‘동풍이 강하게 불서어 곡식이 짓밟히고 피해를 입었습니다. 만약 쌀 2만여 섬을 배로 실어 보내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장차 다 죽을 것입니다.’ -심낙수 장계 정조 18년(1794년) 
 그러던 정조 16년(1792)부터 정조 19년(1795)까지 제주도에는 4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제주도는 그 피해가 더 컸습니다.  제주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 자주 기근에 시달리고, 흉년이 들면 조정만 바라봐야 하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주의 백성들이 육지로 떠나갔다. 비변사가 제주도민의 육지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따랐다.’ 출륙 금지령 『인조실록』


  조선전기에는 기근을 피해 유민이 되어 배를 타고 육지 다른 지방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제주 사람이 뭍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진 조선후기 이후에는 이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섬에 갇힌 채 아사자가 속출했습니다. 그 수가 17,963명에 달했습니다. 사태가 심각하자 정조는 1795년 2월 제주도민을 구휼하기 위해 구호곡물 1만1천석을 보내지만, 수송선단 중 5척이 침몰하면서 제주도의 상황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김만덕은 자신의 돈으로 직접 곡식을 사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돈도 많이 들었지만, 김만덕이 보낸 운반선이 험한 바닷길을 뚫고 안전하게 돌아온다고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김만덕은 아예 30년간 모은 전 재산을 모두 투자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다행히 김만덕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쌀을 무사히 제주까지 운송해 올 수 있었습니다. 김만덕이 전재산을 들여 제주로 들여온 쌀은 60섬(약 10톤)에 이르렀고 약 3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었습니다. 
  ‘만덕이 기생 시절부터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하며 돈만 밝히는 사람이다.’ 『효전산고』
이전에 김만덕을 수전노라고 비방하던 사람들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번암집에는 당시 제주 백성들이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며 '우리를 살린자는 만덕이네'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았습니다. 김만덕의 선행은 조정에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김만덕을 위하여 출륙금지령을 폐지하였습니다. 정조는 김만덕의 여행길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지시했고, 그녀가 한양에 올라온 뒤에는 그녀를 내의원 의녀의 반수(우두머리)로 삼아 천민 신분으로 벼슬을 내리는 특별선물까지 안겨줬습니다. 이는 조선 궁궐의 법도상 기생은 입궁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궁궐을 구경하고 싶은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정조의 배려였습니다. 
  1797년에는 김만덕은 평소 소원이던 금강산 관광길에도 올랐습니다. 당시 명산으로 이름이 있었지만, 양반들조차 쉽게 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금강산 구경을 마친 김만덕이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도성에는 양반과 백성을 가리지 않고 김만덕의 얼굴을 보려는 사람들로 거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만큼 김만덕의 명성을 대단했습니다. 후대에 만덕의 공을 칭송한 이들은 정조, 채제공, 정약용, 박제가, 이가환 등으로 이들은 모두 새로운 조선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보다 경제의 중요성을 알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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