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 이벽

2024. 2. 26. 10:5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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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벽(李蘗, 1754년~1785년)은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이며 이승훈, 권일신등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입니다. 1754년 경기도 포천의 기호학파 남인 집안에서 부친 이부만(李簿萬:1727~1817)과 청주 한씨 사이에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벽의 집안은 대대로 문인이었으나 조부 때부터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 집안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벽의 형과 동생은 무과에 합격하여 황해병마절도사와 좌포장의 직책을 맡았으나 이벽은 과거시험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벽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다산은 젊은 시절부터 30여 년에 걸쳐 유학경전에 대한 연구서인 『중용강의보』를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벽의 도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벽은 다산 형제에게 몇 권을 책을 주었고 그 중에는 『천주실의』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천주실의』는 16세기 북경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마테로 리치가 쓴 책으로 그는 동양인들에게 천주교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유학경전의 이론을 인용해서 설명하였는데 가령 서양에서 말하는 천주는 곧 유교의 상제와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교 신앙과 유학의 관계를 상호 대립된 것으로 보지 않고 천주교 신앙이 유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서 완성시켜주는 보유론을 전개합니다. 당시 조선의 일부 학자들은 서학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성호 이익을 위시로 한 실학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익은 마테오 리치의 저서를 비롯한 서양의 수많은 저서를 읽었고 이벽은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모시는 남인 계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리학적 이념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사상을 느끼고 있던 이벽은 학문에 대한 강증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를 접하며 서구 문물과 정신문화에 매료됐고, 천주교라는 종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아마 고조부 이경상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1612~1645)를 수행해 베이징을 다녀오면서 서학과 천주교 관련 서적을 들여온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벽은 이 책들을 통해서 독학으로 천주교를 접하고 그 교리를 깊이 음미하고 묵상하기를 즐겼습니다. 또한 상인이나 사신들을 통해 서양학문과 천주학 책을 구해서 읽기도 했습니다. 이벽이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했던 것처럼 조선 사회는 천주교를 학문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18세기말에 천주학은 주로 관직사회에서 소외된 남인의 소장파 학인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했습니다. 1777년(정조 1년)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등은 외딴 절에서 천주학을 비롯한 서양학문 강습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벽은 뒤늦게 소식을 접고 모임에 합류했습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이벽은 이미 신앙심까지 있었기에 이벽이 합류한 이후 강습회는 조금씩 종교적인 색체로 변모하기도 했습니다. 서양 선교사가 없는 당시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를 공부하고 신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아버지가 보기에는 염려스러웠습니다. 이벽은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1783년,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승훈을 찾아가 천주교에 대해 소개하면서 중국에 가면 서양 선교사를 만나 영세(세례)를 받고, 교리를 배우도록 설득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한국의 천주교 신앙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서 한국인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스스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사회의 학자들은 대부분 유학을 공부했을 텐데 예수의 보유론적 교리서가 유교를 공부한 사람들에게 거부감없이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사회의 내부에 변화를 바라는 지식층들에게 천주교는 급격히 수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들에게 읽힌 한역 서학서는 아주 초보적인 정보들만 담고 있어 천주교를 이해하는 데에 턱없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누군가 중국에서 가서 많은 정보를 담은 서적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으로 간 이승훈은 그라몽 신부를 만나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고, 천주실의를 비롯한 서학서적 등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항상 자료 부족으로 진리탐구와 연구의 한계를 절감하며 아쉬워하던 차에 이벽의 부탁을 받은 이승훈이 들고 온 것들이었습니다. 이벽은 이승훈이 가지고 온 서적들을 중심으로 교리 연구에 몰두하며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키워갔습니다. 이러한 지식들은 훗날 서학에 반대하던 유림들에 맞서 토론하고 설득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인이 되었으며 서울 수표교 근처에 집을 마련하여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전교에 열성을 보였습니다. 
  이벽은 권철신, 권일신 형제를 설득하여 천주교에 입교시켰으며 중인들에게도 전파했습니다.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지황이 이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설득하려고 한 사람 중에는 이가환이라는 당대 최고의 천재도 있었습니다. 그는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성호학파의 학통을 잇고 있으며 남인을 이끄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천주교에 반대한 이가환은 이벽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사흘간이나 계속된 논쟁이었고 그 자리에는 두 사람의 벗들과 호사가의 무리가 함께 참관하였습니다.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이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가환은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하나하나 논적(論敵)에게 지적되고 조목조목 반박되었다. 이벽은 세밀한 점까지 추궁하여 이가환의 논리를 모두 파괴하고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벽의 말은 분명하고 똑똑해서 사방에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의 논증은 태양같이 빛났고, 바람처럼 휘몰아쳤으며, 칼날처럼 끊어냈다. 이는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온통 사로잡았다.”
  장장 사흘에 걸친 토론은 이벽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두 번째 상대였던 이기양도 거침없는 이벽의 논리 앞에 아무 반박을 못 한 채 입을 다물었습니다. 다만 이가환은 천주교에 대한 우려를 여전히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줄 것이니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천주교회사』, 샤를르 달레.
  1784년 9월, 이벽은 세 번째로 양근의 감호를 찾았습니다. 거기서 만난 권철신 형제는 말문을 닫은 앞의 두 사람과 달리 이벽의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한 이승훈이 귀국하여 천주교회를 설립한 후 전교에 힘썼습니다. 그는 이벽, 권일신 등과 서울 명례동(현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미사를 집전하고 교리를 공부했습니다. 다음해 3월,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명이 이벽의 교설을 듣고 있던 중에 주위의 고발로 도박 단속을 위하여 순라를 돌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갔습니다. 이들의 종교 활동을 처음 접한 형조판서 김화진은 중인 출신 역관 김범우만 투옥하고 그를 제외한 양반들을 모두 석방하였는데 양반 출신들은 모두 배교하여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부 유생들이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 이념인 성리학적 윤리 체계를 파괴한다고 반발하면서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서학(천주교)은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니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정조는 김범우를 경상도 밀양의 단장으로 유배시키고 사태를 마무리지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부친 이부만의 부름을 받고 포천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유림의 온갖 비방을 부친의 배교로 슬기롭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천주교를 버리지 못하고 단식 아사 순교의 길을 택했으니, 선생의 나이 31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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