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빈 강씨

2024. 1. 23. 09:2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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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빈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장남이었던 소현세자의 세자빈이었습니다. 강빈이 세자빈으로 간택된 건 1627년(인조 5년), 17살 되던 해였습니다. 하지만 강빈은 세자빈으로 간택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1625년(인조 3년) 소현세자의 책봉례가 거행되는 시기에 맞춰 파평 윤씨 윤의립의 딸과 가례를 추진했습니다. 소현세자보다 1살 어린 여자였으나 중심들은 ‘윤의립의 서조카 윤인발이 이괄의 난에 가담한 역적이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하여 무산되었습니다. 
 강빈이 소현세자와 가례를 치른 1627년(인조 5년)은 정묘호란이 발생하였습니다. 1월에 후금이 10만 명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침략하자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하고, 16세의 소현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습니다.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으며 전란이 마무리되자 세자와 분조는 3월 말에 강화도로 들어가 복명(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하고 5월 초 한양에 돌아왔고 이후 세자의 가례가 추진되었습니다.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 즉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맞서 싸우자는 척화론과 일단 화해하자는 주화론이 맞선 가운데, 인조는 우선 왕실의 여인들과 왕자들을 피난시키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강화도로 가기 위해 김포 월곶면 갑곶나루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려야 했습니다. 왕실의 피난을 책임져야 하는 검찰사 김경징이 자기 식구들을 먼저 챙기는데 모든 배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에 강빈은 김경징을 엄청 꾸짖었다고 합니다. 강빈의 꾸짖음에 겨우 배가 마련되었고 강화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청나라의 군대는 강화도를 공략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선도 만반의 준비를 해서 그들과 싸울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김경징은 무사태평으로 먹고 놀았으니 청나라 군대가 그 사이에 강화산성에 들이닥쳤습니다. 

사약 받는 소현세자빈


  ‘나와 대군은 마땅히 이곳에서 죽을 것이나 원손이 같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 너희들은 이 아이를 안고 나가서 피해 있으라. 불행히 강을 건너지 못하면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라. 죽든지 살든지 너희들이 잘 처리해라.’ 『연려실기술』
 원손은 살리기로 한 강빈은 자결을 결심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이 말려 그만두었습니다. 1637년 1월 30일,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52일 만에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맺어진 정축화약으로 인해 인조는 맏아들과 다른 아들 하나를 인질로 보내야 했으니 그들이 바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2월 5일 잠깐 도성으로 들어가 인조에게 하직 인사할 기회를 얻었으나, 강빈은 그대로 군영에 있다가 2월 8일 철수하는 예친왕의 군대를 따라 심양으로 향했습니다. 소현세자 일행이 청나라 인질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며느리를 보기 위해 막사에 들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조 15년(1637) 2월 5일, 강빈과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인질이 되어 만주로 갔습니다. 그리고 4월 10일, 60여 일의 여정 끝에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도착했습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잔치를 베풀어 세자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있는 곳에서는 가마를 탈 수 없으니, 빈궁도 성에 이르러서는 말을 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배종관들이 항의하였으나 청은 ‘우리의 국법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며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강빈은 성 밑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고 심양성에 들어갔습니다. 조선에서는 아녀자는 말을 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세자빈은 가마를 타야한다는 법도가 있었지만, 법도 때문에 여러 사람을 고생시킬 수 없다는 마음으로 실리를 위해서라면 체면을 버리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포로의 매매를 허락하여 청인들이 남녀들을 성문 밖에 집합시키니 그 수가 수만이라. 혹 모자가 상봉하고 혹 형제가 서로 만나 얼싸안고 울부짖으니 그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심양일기』
  소현세자의 기록에는 심양으로 잡혀온 수많은 조선인들의 실상이 담겨 있습니다. 잡혀온 조선인은 노예 시장에서 사고 팔렸습니다. 또한 병자호란 때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은 『지천집』에서 청에 잡혀간 50만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믿기 어려운 수치이지만 분명 많은 숫자가 붙잡혀 간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심양 팔왕이 은밀히 은자 5백 냥을 보내 무역을 요구하였다.’ 『인조실록』
  팔왕은 청 태조 누르하치의 열두 번째 아들로 청의 최고위층 왕족이 밀거래를 제안했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군사력은 막강했지만, 청나라 귀족의 생활 수준은 유목민이어서 그런지 화려하지 않았고 농사와 수공예에 서툴렀습니다. 그리고 원래 수렵민족이었던 지라 농경문화에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적대국인 명나라를 상대로 교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을 교역상대국으로 여기고 심양관은 팔왕과의 무역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심양관은 1637년(인조 15) 청나라에서 소현세자 일행을 수용하기 위해 건립한 곳으로 이 거래의 중심에는 강빈이 있었습니다. 강빈은 경제활동에 앞장섰고 ‘진기한 물품들을 무역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같았다’고 『인조실록』에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국제시장은 강빈에게도 엄청난 부를 안겨다주어 강빈의 개인 재산만도 은 1만 650냥, 황금이 160냥에 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조는 심양관과 강빈의 무역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인조는 왕실의 세자빈이 오랑캐를 상대로 장사를 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조선에서는 삼종지도라 하여 여성이 지켜야 하는 법도가 있었으나 세자빈의 적극적인 경제활동은 조선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청나라에서는 돈을 대 줄 수 없으니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라는 제안을 하였고 이후에는 조선인 포로를 돈으로 주고 사서 농사를 짓고 살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청나라의 이러한 제의는 재해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신하들은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노예시장에서 조선인들의 실상을 보았던 지라 강빈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청나라가 준 땅은 황무지나 다름없었습니다. 거칠고 험한 땅이었지만, 조선의 우수한 기술로 농사를 지어 좋은 결과를 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필요한 것보다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었고, 품질도 청나라의 것보다 좋아 좋은 값에 팔렸습니다. 강빈은 농사를 잘 짓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에 한몫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빈은 벌어들인 돈으로 조선인들을 사들여 포로에서 해방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인조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에는 정축화약이 있었는데 ‘만일 인조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왕으로 세울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강빈에 대한 인조의 증오는 높아져 갔고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친정에 가는 것조차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자가 돌아올 때에 북경의 물건들을 많이 싣고 와서 사람들이 매우 실망했다.’ 『인조실록』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세자부부는 점점 고립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의문스런 죽음을 당하고 그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세자가 죽으면 원손으로 하여금 왕통을 잇게 한 조선의 법도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자빈 강씨는 인조를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죄인 신분이 되었고 세자빈은 지위를 박탈당했고, 소현세자의 측근들 모두 숙청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세자빈을 모시던 궁녀들은 모진 고문에도 세자빈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며느리에 대한 증오가 폭발한 인조는 결국 세자빈에게 사약을 내렸고, 세자빈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구심점을 잃은 궁녀들은 그제서야 세자빈의 죄를 토설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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