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2024. 4. 9. 09:2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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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은 1795년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지은 회고록으로 모두 4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는 가운데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즉,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지난날 몸소 겪었던 일들을 서술한 것으로, 부군(夫君) 사도세자가 부왕(父王)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참변을 주로 하여, 공적, 사적 연루와 국가 종사에 관한 당쟁의 복잡미묘한 문제 등 여러 사건들 속에서 살아온 일생사를 순 한글의 유려한 문장으로 묘사한 파란만장한 일대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문체에 등장인물의 성격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으며, 이 글을 통하여 조선 여성의 이면사(裏面史)를 엿볼 수 있다는 점과 당시의 정치풍토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며,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궁중 문학으로 일컬어집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방대한 역사서적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너무 간략하고, 승정원일기는 정조의 청으로 세초됐기 때문에 한중록을 제외하면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으므로 이 책은 임오화변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인의 관점에서 정치적 격변을 기록한 것은 드물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세한 서술에서 궁중 용어, 궁중 풍속 및 사대부 사회의 인정 풍속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간택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또한 『한중록』은 조선의 복식을 포함한 궁중 풍속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나는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죄를 지었다./나는 어미로서의 도리도 다하지 못한 여인이었다. /나 때문에 친정 식구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억울하고 원통할 뿐이다.’ 『한중록』
이 책에 붙는 이름은 설움과 한의 기록이라는 『한중록』, 궁궐 여인이 한가롭게 쓴 이야기라는 의미로 『한중만록』, 또는 피눈물을 흘리며 쓴 기록이라는 뜻으로 『읍혈록』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한 외가에 대한 증오심과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홍봉한은 당시 세손을 보호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영조의 척신으로서 사도세자를 비호할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쟁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에서 홍봉한의 행적은 약점을 잡히기 충분했습니다. 세손 시절 정조가 외가와 점점 거리를 두면서 홍씨 가문 역시 정조의 보호자에서 반대세력으로 돌아선 상태였습니다. 정조는 직접적으로 홍봉한을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탄핵을 받고 몰락하는 과정을 사실상 방치했습니다. 여기에 1777년에는 '정조 암살시도 사건'이 발생하고 여기에 홍씨의 친동생이자 정조에게는 외삼촌이었던 홍낙임이 연루되었다는 폭로가 나왔습니다. 홍낙임은 비록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홍씨의 가족들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 칩거하듯 살게 되었습니다. 애지중지했던 아들의 손에 친정이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던 홍씨의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홍씨는 ‘나로 인하여 우리 집안이 이리되었다. 생각할수록 내 몸이 없어져 불효를 사죄하고자 하였다’며 자책했습니다.
홍씨는 자신의 가문이 사도세자의 죽음이나 정조에 대한 반역에 핵심적으로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벗고 싶어했습니다. 이에 정조는 어머니를 위하여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날 것이고, 순조가 외가인 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겠다는 것. 정조는 아직 홍씨 가문에 대한 의심과 앙금이 남아있는 상태였고, 정치적인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보다는 아들 순조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혐의를 풀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조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정조 24년(1800년), 정조가 죽었습니다. 아직 혜경궁 홍씨는 살아있었던 지라 더욱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조의 뒤를 이어 혜경궁의 송자 순조가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 열한 살이었습니다. 따라서 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습니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예순여섯에 맞이한 부인으로 그의 나이는 겨울 열다섯살이었고, 혜경궁보다 10살이나 어렸습니다. 그리고 경주김씨는 당대의 명문이자 혜경궁 홍씨의 친정 풍산홍씨와는 정치적 맞수였습니다. 그러면서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는 문안 순서를 정비했는데 혜경궁을 자신의 며느리보다 낮게 위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친손자인 순조의 혼례 때는 폐백조차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혜경궁 홍씨와 더불어 정조까지 무시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정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정조가 무죄를 선언했던 동생 홍낙임이 역적으로 몰린 것입니다. 즉, 퐁산 홍씨를 처벌하는 경주김씨의 보복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순조 1년(1801) 홍낙임은 결국 사약을 받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동생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죽은 지 2년째 되었을 때, 혜경궁 홍씨는 붓을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혜경궁 홍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한중록은 전체 4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편은 1796년 정조 재위 19년에 쓴 것으로, 서두에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작성한 글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제2편은 1801년(순조1)에 쓰여진 글로, 당시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자신의 친정 집안이 홍국영의 모함으로 당한 화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소상하게 밝히고 사면을 호소하는 목적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제3편은 1802년(순조2)에 쓰여진 글입니다. 임오화변으로 겪은 비통함과 더불어 부친 홍봉한은 이와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고, 아들 정조의 효행과 외할아버지의 충절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고 친정 집안의 신원을 약속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세자의 병환이 위중했던 것은 사실이며 당시에 일어난 비극은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제4편은 순조 재위 5년인 1805년에 쓰여진 글이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의 전말에 대해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조가 죽은 지 3년, 순조 3년(1803),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혜경궁의 손자인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중록』을 통해 손자는 할머니의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순조 8년(1808), 순조는 먼저 왕명으로 외증조부 흥봉한의 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정조가 편찬했던 홍봉한의 문집 『어정홍익정공주고』를 발간하였습니다. 또한 억울하게 죽은 홍낙임도 복권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의 배경에는 『한중록』이었었습니다.
『한중록』은 저자인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빈이요. 영조의 며느리요. 정조의 모후입니다. 그가 체험했다는 것이 읽는 사람에게 소설인지 역사인지 헷갈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홍씨가 체험한 너무나도 기구하고 극적인 사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부왕이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 그리고 지아비를 죽인 시아버지와 친정 동생 홍낙임을 죽인 시어머니 밑에서 효부노릇을 다해야 하는 며느리와 시부모 사이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증폭시켜 살육의 극한상황으로 몰고간 음해와 모함의 당쟁이 얽힌 궁중정치, 『한중록』이 다루고 있는 영조에서 정조, 순조에 이르는 궁정드라마는 허구로 지은 어떤 소설보다 더욱 드라마틱하면서도 역사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쓴 글이지만, 본명 이후에 볼 누군가를 의식하며 쓴 글입니다. 고종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혜경궁의 『한중만록』은 언문으로 사실을 직접 기록한 것이어서 실로 오늘날의 확증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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