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

2024. 4. 13. 09:2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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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생모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중록』의 작가로 더 유명합니다. 
  혜경궁 홍씨(이하 홍씨)는 1735년 6월 18일 서울 거평동(오늘날 서대문 밖 평동)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인 아버지는 혜경궁 홍씨가 태어나기 전에 검은 용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홍씨는 집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그의 조부인 홍현보는 그녀가 보통 아이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나름 명문가문이었습니다. 6대조인 홍주원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결혼한 임금의 부마였습니다. 그리고 고조할아버지 홍만용은 예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현보도 예조판서를 지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노론계의 명문가로, 영조의 정치색과 비슷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 19년(1743)에 궁궐에 가서 영조를 뵈었습니다.
  ‘그 해 나라에서는 간택단자를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 때 우리 집은 심하게 빈곤하여 옷을 새로 해 입을 방법이 없었다.’ 『한중록』
  영조의 세자가 가례를 올릴 나이가 되자 간택령이 내려졌습니다. 따라서 혜경궁 홍씨도 가난했지만, 나라의 명에 따라 급하게 옷을 지어입고 궁궐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남편이 될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와 마찬가지로 1735년생이었습니다. 당시 혜경궁 홍씨를 본 영조는 아름다운 며느리를 얻었다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세자의 빈이 된다는 것은 사대부 여인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마냥 좋을 수는 없습니다. 왕실의 외척이 된다는 것은 혜경궁 홍씨가 궁궐에 들어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간택에 임한 지 5개월만인 이듬해 정월,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와 혼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불과 10세의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가 궁궐에 들어가자 혼인 당시 등과(登科)도 못하고 9품직에 머물러 있던 홍봉한은 자주 떨어졌던 문과 전시에 합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자빈 홍씨의 궁궐 생활은 고달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남편인 세자와 함께 궁궐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가야 하는 일로 하루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세자빈과 달리 세자는 태평이었습니다. 세자빈은 그런 세자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딸이 궁궐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아버지 홍봉한은 최말단 하급관리(세마, 정9품)에서 광주부윤(종2품), 승지(정3품), 참의(정3품)으로 승진하면서 9년 만에 예조판서(정2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도 세손을 낳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정조입니다. 
 정조가 세상에 나오기 4년 전에는 화평옹주가 사망하였습니다.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난 뒤 15세가 된 세자 부부는 성인식을 치르고 비로소 합방을 했습니다. 마음이 설레던 성인식 날, 갑자기 영조는 세자에게 선위교서(禪位敎書)를 내렸습니다. 영조는 여리면서 감정기복이 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나면서 의지해야 하는 세자를 오히려 멀리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는 사실 영조가 4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영조가 경종독살설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었고 결국, 자식마저도 자신을 선왕을 죽인 살인자로 보는 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사도세자가 왕위를  선위교서(禪位敎書)를 내리는 것도 일종의 쇼일지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시아버지인 영조와 남편인 사도세자 사이에서 혜경궁 홍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1755년(영조 31)에 친정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고, 세자 편이었던 대비 김씨와 왕비 서씨마저도 승하하면서 세자 편에 서줄 사람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영조는 급기야 공공연히 세자에게 면박을 주었고, 세자의 울화증은 깊어 갔다고 합니다. 사도세자는 명민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아버지 앞에만 서면 두려워서 대답을 빨리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영조의 꾸중은 점점 엄해져가고 아들은 그런 부왕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영조 33년 (1757), 중전 정성왕후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사도세자는 극진히 간호했다고 합니다. 정성왕후는 생모는 아니었으나 세자를 친아들 이상으로 대해주어 사도세자도 슬펐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조가 병문안을 온 날, 세자는 방구석에서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조는 그런 사도세자의 옷차림새에 대해 불같이 야단쳤으니 부자의 관계는 자꾸만 엇나갔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상이었을 것이며, 사도세자는 마음속에서 아픔을 원치 않게 키워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정신질환으로 이어져 걸핏하면 잘 놀라는 증상(경계증)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천둥과 벼락이 치는 날이면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모르는 모습(뇌벽증)을 보였고, 옷차림에 대해 거듭된 꾸중으로 옷 입기를 두려워하는 병도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세자의 병은 악화되었고, 부왕에게 꾸중을 듣고 난 날이면 억울하여 시중들던 내관이나 궁녀들을 폭행했다고 합니다.


  영조 34년(1758년), 영조는 아들의 폭력성을 알고 사도세자를 찾아갔습니다. 무슨 이유로 내관과 내인들을 폭행했는지 꾸짖었습니다. 이에 세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리 했다고 하였고 마마께서 사랑해주지 않아 서글프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서 화증이 되어 그러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영조는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영조는 이 사실을 혜경궁에게 가서 확인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이에 너무 감격하여 울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앞으로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혜경궁 홍씨의 생각과 달리 냉정했습니다.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에게 아버지 말씀을 믿을 것이 없다면서 필시 자신은 죽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조 38년(1762),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혜경궁 홍씨는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하늘이 내린 병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임오화변은 예고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얼마 전부터 영조는 세손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임오화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761년, 영조는 세손의 성균관 입학례를 명하고,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관례식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영조는 이미 사도세자가 아닌 세손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조 38년(1762년), 사도세자가 세자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뒤주에 들어가기를 명령받던 시간에 혜경궁 홍씨는 궁 밖에 있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와 함께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절규를 들어야 했습니다. 당시 대신들은 친정에 머물러 있는 혜경궁 홍씨를 뵈러 찾아왔습니다. 사도세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도록 세손이 석고대죄하도록 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죄를 입어 뒤주 속에 갇혀 있는 상황에 아들인 세손이 석고대죄를 통해 용서를 구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칫하면 영조의 화가 세손에게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오화변 이후 혜경궁 홍씨는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아버지는 남편을 빼앗았지만, 그의 마음을 얻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손을 음해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영조에게 맡겨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영조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세손을 죽은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라는 명을 내립니다. 
  1776년 3월 마침내 혜빈 홍씨의 아들이자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생모인 혜빈 홍씨를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지성으로 효도를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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