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평통보

2024. 6. 23. 07:0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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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초기에 저화라는 지폐가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런 화폐보다는 쌀이나 면포 같은 현물거래를 선호했습니다. 때문에 조선 초기 화폐정책은 경제적 목적을 위한 화폐정책이라기보다는 재정정책이라고 평가되는데, 쉽게 말해 백성들에게 돈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동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이러한 저화를 보완하자는 의미에서였습니다. 동전은 실물 가치를 어느 정도 보증하므로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에서 세종 5년(1423년) 조선통보를 발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화폐 사용 경험이 부족했고 화폐에 대한 불신이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조선에 들어온 명군이 은화를 가지고 물건을 사려고 해도 물건의 매매가 불가능한 상황에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실행되지는 않았으나 대동법의 시행으로 화폐 주조에 대해 관심이 다시 높아졌습니다. 대동미를 직접 들고 다니면서 물건을 사려니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인조 3년(1625년) 조선통보 60만 개를 주조했지만, 주전량 부족 등으로 곤란을 겪다가 정묘호란을 맞아 중단되었고, 상평청을 설치하고 조선통보(팔분서체)를 주조 유통했으나, 불과 몇 년 뒤에 병자호란이 터지면서 화폐 주조는 중단되었습니다. 이후로 동전 유통은 한반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나갔으나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조정 내에서 화폐에 대해서 불신하는 의견도 아직 컸지만, 현실적으로도 구리의 부족이 발목을 잡았고, 당시에는 일본산 은의 유통이 활발하던 시절이라 '동전이 은보다 나은 게 뭐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숙종 4년(1678) 1월 23일로, 허적이 새 화폐 제조와 유통을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상평통보가 주조되었습니다. 돈 400문(文)을 은(銀) 1냥의 값으로 정한 후 시중(市中)에 유통하게 한 것입니다. 문(푼)은 냥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가치로, 상평통보 4냥이 은 1냥의 가치를 지녔습니다. 은은 상평통보 4배의 가치를 지닌 셈입니다. 조선시대의 화폐 단위인 1문은 1푼이라고도 했으며, 10푼이 1전, 10전이 1냥이 되었습니다. 10냥은 1관으로서 관이 최고 화폐 단위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법전인 『대전회통』의 기록에 의하면 1냥으로 쌀 20㎏ 정도를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요즈음의 쌀값을 고려하면 은 1냥의 가치는 5만원 정도로 꽤 고액입니다.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이 역관 변승업에게 빌렸다는 1만냥은 현재 가치로 5억원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평통보는 지금의 동전처럼 둥글지만 가운데 사각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을 둥글고 땅은 사각형이라고 여긴 옛 사람들의 천문사상을 돈을 만들 때 본뜬 것입니다. 옛 동전을 엽전(葉錢), 즉 '나뭇잎 모양의 돈'이라 한 것은 그 제조 과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돈을 주조하던 틀인 거푸집이 나뭇가지에 여러 개의 잎이 달린 모양을 하고 있어서, 쇳물이 이 안에서 굳으면 전체적인 모양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처럼 보여 엽전이라 부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돈은 한국조폐공사에서 만들어 냈고 조선시대에서는 여러 관청에서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해 상평통보를 주조했습니다. 그래서 상평통보 뒷면에 주전소를 표시하는 기호가 있는데, '江(강원감영)', '春(춘천관리영)', '平(평안감영)', '京(한성부)' 등이 그 예입니다.
  동전 확산의 배경에는 일본의 은 수출 제한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 청나라가 해금 정책을 해제하면서 일본으로 쇄도하는 중국 상선이 늘어났습니다. 이에 일본에서는 1685년 내항하는 중국 상선의 머릿수를 제한하여 은 유출을 줄였고, 1695년에는 은화를 은 함량 80%의 게이쵸 은에서 은 함량 64%의 겐로쿠 은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조선은 이에 대해서 인삼을 무기 삼아 인삼에 한해서 80% 은을 계속 뜯어낼 수 있었지만, 이전의 중국산 생사 · 비단 무역은 타격을 받아 은의 유입량이 줄어 들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한편으로 은을 구리로 대체하려 노력하였고, 이에 1710년대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은보다 구리의 공급이 원활해졌습니다. 이에 힘입어 조선에서는 상평통보를 유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00년대 호머 헐버트가 펴낸 월간지 「더 코리아 리뷰」에서 상평통보를 복원하고 성분을 분석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더 코리아 리뷰」에서는 상평통보를 만들 때 비율이 구리와 아연과 납의 비율이 6:3:1이었습니다. 상평통보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아연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던 그런 유물들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숙종 때가 돼서 아연이라는 것들을 본격적으로 도입을 해서 그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주석 대신 아연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요 합금기술이 청동 기술에서 황동이나 다른 것을 섞어 쓰는 기술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금속화폐를 만들 때 주석 대신 아연을 섞어 쓰게 되면 완성된 화폐의 주조성이 더 좋아지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주조성이 좋아진다는 것은 쇠붙이의 녹는점이 낮고, 유동성이 좋아서 화폐를 만들기에 알맞은 성분이 된다는 뜻으로 상평통보에 넣는 글자나 무늬가 잘 새겨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화폐는 위조가 방지되어야 하는데 상평통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주전이라 하여 개인이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는 일이 있던 것입니다. 상평통보의 위조 방지를 위해 앞뒷면에 한자와 문양을 넣어서 주전소를 표시하고 민간에서 가짜 상평통보를 유통 시킨 범인을 색출하여 엄벌을 내리는 등의 관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동전의 폐단에 대한 상소가 잇달아, 1698년부터 동전의 주조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1731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영조 재위 7년(1731년)에 전국적인 흉년이 발생하여 영조도 피해 복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해 9월에 호조와 진휼청에 화폐 제조를 허락했는데 사실 영조는 화폐를 반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17세기 말기부터 18세기까지 상평통보의 주조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숙종실록』 5년(1679년) 9월 16일조 및 『영조실록』 7년(1681년) 10월 23일조를 보면 화폐 제조에 따른 이윤율이 각각 50퍼센트나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정부는 더 많은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는 것에 노력했습니다. 18세기 초반에는 백성들이 더 많은 화폐의 공급을 정부에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필요할 때만 주조하던 방식에서 18세기 중반부터는 정기적으로 주조하는 식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따라서 1700년과 1800년 사이에 호조의 화폐 수입은 400퍼센트, 1750년과 1800년 사이에 선혜청의 화폐 수입은 약 60퍼센트가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화폐주조에 대한 원료 확보 비용을 낮추는 것이 관건이었고 이것이 쉽지 않다 보니 정부가 가져가는 이득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순조 25년(1825년)과 동왕 29년, 30년 세 차례에 걸쳐 상평통보를 주조하였는데 주조 원가 대 액면가의 비율은 각각 92퍼센트, 73퍼센트, 73퍼센트로 주조 차익이 줄어만 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전의 무게를 줄였습니다. 그래서 18세기 초에서 19세기초까지 동전의 무게가 대력 50퍼센트나 줄었습니다. 하지만 동전의 무게가 줄어들면서 화폐의 가치도 떨어졌고 주조 이익도 떨어졌으며 금속 가격이 상승하여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정부는 이에 대전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당오전과 당십전같은 것은 상평통보의 몇 개의 구매력을 가졌고, 당백전은 더 한 구매력을 가졌기 때문에 정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한편으로는 정부의 재정수입을 증가시키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백전의 액면가는 기존 상평통보의 100배였지만, 금속 본래의 가치로 볼 때는 5~6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부에서는 당백전의 사용을 강제하기 위해 조세 등을 납부할 때에 3분의 2를 당백전으로, 3분의 1을 상평통보로 비율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무기 수리, 요새의 수선, 지방 관아에 대한 지원, 새로운 환곡 자금의 조달에도 당백전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낫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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