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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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은 요승인가, 개혁가인가.
이름은 편조, 자는 요공인 신돈은 출생연도가 불분명한 영산의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계성현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옥천사라는 절의 여종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돈의 출신은 미천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승려들 사이에서도 끼지 못하는 신세였으며 산속 깊은 암자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공민왕은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누가 칼로 자기를 찌르는 것을 어떤 승려가 곁에 있다가 구해주는 꿈이었습니다. 다음날 태후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이후 김원명이 신돈을 데리고 공민왕에게 보였는데 그 모습에 꿈에서 본 모습과 닮아있었습니다. 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와 이야기해 보았는데 무척 총명하고 지혜롭다고 느꼈습니다. 신돈은 글을 읽지 못했지만 개경을 돌아다니며 불교를 권하고는 허황된 마로 과..
2022.10.02 -
공민왕의 개혁은 왜 실패했나.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고 12세가 되던 1341년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1249년 원나라 위왕의 딸인 보탑실리와 결혼했습니다. 보탑실리는 혼인과 동시에 승의공주에 책봉되었고 사후에는 노국대장공주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1351년 충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31대 고려국왕인 공민왕이었습니다. 사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가 장자가 아니었을 뿐더러 그의 어머니가 고려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9대 충목왕이 자식 없이 죽게 되자 그의 동생이 왕위에 올라 충정왕이 되니 그가 왕이 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충정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 외척과 간신들이 등장하여 국정을 어지럽혔으므로 충정왕은 폐위되고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
2022.10.01 -
원나라 간섭기의 고려왕들
1259년, 고려에서 화친론이 대두될 즈음 이를 해결하기 위해 후에 고려원종이 되는 태자 왕전이 대칸의 신하로 입조하기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 때 4대 몽케 칸이 죽는 바람에 잠시 고민에 빠진 태자는 대권주자인 쿠빌라이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후 쿠빌라이가 대칸이 되니 그가 세조였고 국호도 원나라로 바꿉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조의 정권에 힘을 보태준 것이 바로 고려의 왕자 왕전의 입조였습니다. 아무래도 막내아들이 대를 잇는 몽골의 풍습상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에 비해 그 정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에게 저항하던 남송과 고려 중에 고려가 자신의 신하로 자처하여 들어왔으니 힘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 과거 친히 정벌에 나섰던 당 태종조차도 굴복시키지 못..
2022.09.30 -
고려로 귀화한 이용상과 귀화인들
1010년 베트남에서는 리왕조가 건설되었습니다. 이공온이 세운 이 왕조는 현재의 하노이를 수도로 정한 나라였습니다. 베트남 국민들은 스스로 황제라 칭한 이공온을 베트남의 정체성을 확립한 군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2대 태종 대에는 국호를 대월이라 불렀으며 성종·인종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후 리왕조는 송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베트남 역사에서 유일하게 중국침공을 시도한 왕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왕조 시기의 리트엉끼엣은 송나라의 전쟁을 통하여 유명한 노래를 만들었으니 이 노래는 오늘날 베트남인들에게 독립선언문처럼 여겨진다고 합니다. 그러던 1175년 즉위한 고종은 리왕조의 이전부터 보인 쇠퇴를 부추겼습니다.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부역을 강요하는 등 백성들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2022.09.29 -
경천사지 10층석탑 그 끝나지 않은 여정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거대한 불탑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리암을 만들어진 이 탑은 다른 한국탑들과 다른 이미지와 더불어 13미터가 넘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바로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입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지만 이 위치에 있기까지 슬픈역사를 간직한 탑이기도 합니다. 이 탑이 소재해 있던 경천사는 지금의 개성에 있던 절로 고려 전기에 건립된 사찰이었습니다. 이 절에서는 역대 왕과 왕후의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엄청 중요한 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조선이 들어서면서 절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절에 있던 탑이 바로 경천사 10층 석탑입니다. 이 탑은 당시 황제폐하와 황후, 황태자의 안녕을 기원하며 만든 것이라고 건립배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2022.09.28 -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의 가치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고려말기의 승려인 동시에 학자로 호는 묵암입니다. 그는 1206년에 경북 경산 지역의 향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견명이며 자는 회연이었으나 후에 일연이라고 고쳤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태양이 배를 비치는 꿈을 꾸고 태기를 얻어 그를 낳았으며 어려서부터 불교에 뜻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아홉 살 때부터 광주 무량사에 글공부를 하였으며 14살 때에는 중이 되었습니다. 22살이 되던 고종 14년에는 승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1283년에는 국사가 되었습니다. 최씨 정권기에는 대장도감에서 대장경 조판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무신정변기 이후의 왕인 원종과 충렬왕에게도 존숭을 받는 고승이었다고 합니다. 일연에 대해서는 과묵하고 허튼 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대했다고 합..
2022.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