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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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왜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었을까.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은 호류사 5층 목탑이라고 합니다. 이 목탑은 7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높이가 30미터에 이르는 이 목탑은 여러 차례 보수과정을 거치면서도 처음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가 80미터에 이르는 탑이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높이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존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높이가 높은 이 목탑은 여러 차례 벼락에 맞았습니다. 이 목탑을 짓고 나서 50여 년이 지난 효소왕 시절에 벼락에 맞더니 신라 시절 내내 벼락에 몇 번이고 맞았습니다. 이후 왕조가 바뀌었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벼락에 맞으면 다시 짓고를 반복한 이 황룡사 9층 목탑은 결국 몽골의 침입 아래 불태워졌습니..
2022.07.18 -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
조선 후기의 문신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로 글씨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동시에 그는 금석문학자로 옛 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줄 아는 선비였습니다. 그는 비문을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를 찾거나 무덤을 추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정희가 했던 일련의 모습들은 현대의 고고학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마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첫 번째 고고학자일지도 모릅니다. 김정희는 친구 김경연과 1816년 북한산에 올라왔습니다. 그들이 올라간 비봉에는 이끼가 잔뜩 낀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이 비봉이란 이름도 비석이 하나 있어서 그렇게 이름지어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 비봉의 비석에 대해 신라시대의 도선국사가 후에 무학대사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위해 이곳에 올라올 것이라는 ..
2022.07.16 -
단양적성비, 신라를 알려주다.
1978년 1월 국내 한 대학교 학술조사단은 온달의 유적을 찾기 위해 충북 단양을 탐사하였습니다. 이들은 단양에 있는 성재산에 들렀지만 밤새 내린 눈으로 힘들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돌에 발을 올리고 신발을 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돌덩이에 글자가 써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들 눈에 띈 것은 대(大)였으며 이어 아(阿)자와 간(刊)자도 보였습니다. 이들은 발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이 땅의 선조가 남긴 것, 단양 신라 적성비를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단양 적성비는 성재산 정상부의 323미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높이 93cm, 폭 107cm, 두께 25cm의 크기인 적성비는 그 형태가 두꺼웠는데 위가 넓고 두꺼웠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좁아지고 얇아진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윗부분은 잘려..
2022.07.15 -
천마도의 비밀
1970년대 한 무덤의 발굴이 있었습니다. 경주 155호 고분이었는데요.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적석목곽분인 이 무덤에서는 만 여 점이 넘는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된 것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무껍질에 그려진 말의 그림이었습니다. 특히 이 그림이 주목을 받은 이유는 신라의 회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인데다 그 수준도 높았기 때문입니다. 1500여 년 동안 묻혀 있었으니 발굴 당시 모습은 안좋을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발굴에 엄청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젖은 솜과 화선지로 덮어 서울로 이송된 그림 바로 천마도였습니다. 이 천마도는 가장 자리가 벌어져 나무껍질이 보이는데요. 그 재질은 바로 백화수피, 자작나무 껄..
2022.07.14 -
신라 정권 유지 장치 근친혼
조선 말기 노량나루에는 큰돌이라는 노처녀가 문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신부가 첫날밤에 웃저고리를 벗기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를 미심쩍게 여긴 신랑이 곤히 잠든 큰돌이의 저고를 벗겼는데 팔뚝에 자기가 모르는 사내의 이름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른바 연비라는 풍속입니다. 이 풍속은 우리 조상들이 행한 것으로 고려에서 조선말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우정분을 나눈 연인끼리 서로의 이름을 팔뚝이나 허벅지에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친정에 알려지자 큰돌이를 친정에서 업어와 물을 적신 종이를 얼굴에 붙인 후 질식사시키고 강물에 버려졌습니다. 사실 이러한 데에는 연비라는 풍속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팔에 새겨진 사나이의 실체 때문입니다. 바로 같은 마을에 사는 동성동본..
2022.07.12 -
황금의 나라 신라 황금은 어디서 왔을까
우리가 신라를 수식하는 말로 황금의 나라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중국 측의 기록과 일본의 기록은 물론 845년에 아랍인 이븐 쿠르다드비가 편찬한 『왕국과 도로총람』이란 책에도 신라를 언급하여 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신라의 도읍인 경주 근처에는 금을 채굴할만한 광산이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경북내륙 지역에 존재한다고 하는데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양이 과연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불리게 할만큼 엄청난 생산량을 보였을까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인 구한말 서구열강이 이권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우리에게서 조선 최대의 금광지역의 채굴권을 가져갔습니다. 그것은 광혜원 설립자인 알렌의 의한 것으로 그는 왕실과의 친분으로 인해 평북 운산의 채굴권을 넘긴 것입니다. ..
2022.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