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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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서기석은 누가 새겼을까.
고대로 갈수록 전해오는 글이 적어지므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한정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당시의 글을 담은 비문은 당시의 실상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신라에서는 당시의 실상을 전해주는 비문이 여러 개 전해져 옵니다. 그 중에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두 청년이 임신년(壬申年)에 하늘에 충도(忠道)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그 전년(前年)인 신미년(辛未年)에는 유교 경전을 학습할 것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비석입니다. 이 비석이 세상에 알려진 대는 1934년입니다.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주사였던 오사카 긴타로는 기와를 탐구하기 위해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 소재한 석장사지(錫杖寺址)를 방문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절터 북쪽의 있는 작은 언덕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의 발끝에 곡선 모..
2022.12.09 -
동궁과 월지에 담겨진 역사
문무왕 14년인 서기 674년 2월대궐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여러 가지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는데 이 때 판 못을 안압지 혹은 동궁과 월지라고 합니다. 발굴 전 둘레는 800m였고 석축은 완전히 매몰된 상태였습니다. 발굴을 하는 동안 석축이 드러났으며 귀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시대 조경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은 인공호수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많은 우물이 발견되었는데 경주는 물이 많이 솟아나는 지형조건과 풍류를 즐기는 문화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월지입니다. ‘월지궁에 입궁시켰다.’ 헌덕왕 14년 (822) 이 기록을 통해 이 연못이 월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월지..
2022.12.01 -
법흥왕은 왜 이차돈을 희생시켰을까.
법흥왕 시절 그의 가까운 신하로 이차돈이 있었습니다. 법흥왕은 불교를 신봉하여 이를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현이 어려웠습니다. 이에 이차돈은 왕명을 가장하여 천경림이란 곳에 절을 짓겠다고 합니다. 이에 귀족들이 반발하면 자신에게 죄를 물어 목을 쳐 달라고 합니다. 불교를 흥하게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부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며 이차돈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과의 밀약 하에 천경림에 이차돈은 절을 짓고자 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의 진실에는 이차돈이 법흥왕과 짜고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차돈이 단독으로 일을 진행하여 절을 지었다고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가 절을 짓고자 하는 천경림이란 곳은 어떤 곳인가. 바로 신라 지배자들의 고유의 신을 ..
2022.11.26 -
나당 전쟁의 승기를 가져오다. 매소성 전투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 야욕을 드러내므로 나당전쟁을 불가피했습니다. 당시 당이 백제왕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으면서 신라를 견제하자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이에 대항합니다. 이에 당고종은 고간 이근행에게 4만의 군사를 주어 평양으로 진군케 하였는데 이를 신라상장군 의복이 현재의 예성강 부근의 백수성에서 당군과 만나 혈전을 벌여 당군 수천을 베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당나라군을 추격한 신라군은 지금의 황해도 서흥으로 추정되는 석문에서 다시 한 번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전쟁의 공을 자신들에게 가져가려는 욕심 때문에 제대로 된 협력과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열이 흐트러졌고 당군은 이 빈틈을 노려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이 연합된 군대에게 참패를 안..
2022.11.11 -
울진봉평신라비
선조가 남겨놓은 유물은 발굴단에 의해 찾아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연한 기회에 일반인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합니다. 울진 봉평 신라비도 그러한데 이 비는 1988년 1월 20일 울진 봉평리에 있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한 농부는 자신의 논에 박혀 있던 이 비를 농사에 방해하는 것쯤으로 여겨 빼내어 하천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두 달 뒤인 3월 20일 이 지역의 이장이 버려진 이 비를 발견하고는 이 돌을 정원석으로 쓰기 위하여 포클레인으로 마을 옆 빈터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면서 돌에 묻은 흙을 씻어내리게 되었고 그러면서 희미한 글씨가 보였기 때문에 평범한 돌이 아니라고 여긴 이장은 울진 군청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는 신라시대의 비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견된 ..
2022.11.10 -
우리가 알고 있는 문무왕릉, 과연 맞을까.
지난 1967년의 일이었습니다. 경주 동쪽 약 30km의 동해안에서 둘레 이백미터 정도 되는 바위를 발견하였습니다. 동서와 남북 두 갈래로 십자수를 깎아 그 중앙에 4평 가량의 해중 못을 만들어 석함 속에 유골을 묻은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바로 신라 문무왕릉으로 경북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석함 위에는 길이 3.59m, 두께 0.9m, 너비 2.85m의 큰 거북모양의 화강암이 덮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능의 조영방식은 사문을 배치하고 그 중에 사리를 앉힌 기원전 2세기의 산치탑을 비롯하여 기원전 5,6세기 중국의 육조 시대의 목탑의 방식과 비슷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분황사탑, 백제의 미륵석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록에서는 문무대왕이 “내가 죽으면 인..
2022.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