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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정치체제를 확립한 성종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청했다. 학교 재정을 확충해 선비를 양성하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등용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일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그런 어진 군주이다.’ 고려 후기의 이제현의 평가에 따르면 성종은 어진 군주로 조선의 성종 못지않게 왕으로서 훌륭한 수완을 발휘한 리더로 생각됩니다. 고려에서는 34명의 존재하는데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물론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다르지만 그가 좋은 정치를 펼쳤다는 데에 대부분의 후세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종의 치세에는 선대 왕인 광종의 숙청이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가 일..
2022.08.16 -
왕규의 난으로 둔갑한 고려 왕자의 난
고려 태조 왕건은 장남은 무를 태자로 삼았으니 그 때가 921년의 일입니다.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자를 점찍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그가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여러 세력가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에 따라 한반도 왕조 역사상 가장 많은 부인은 거느렸고 따라서 많은 아들도 둘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죽고 난 후 왕위쟁탈전이 벌어질 수 있으니 이를 대비하고 후계자를 선정한 것입니다. 그래도 태조에게는 여전한 근심거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태자 무의 외가집안이 세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태자로 내세울 때 반발도 예상했던 것입니다. 태자 무는 태조의 제 2비 오씨의 아들로 나주출신 다련군의 딸입니다. 그의 집안이 다른 집안에 비해 세력이 약하여 임신을 원하지 않았으나 오씨가 억지로 임신을 하였다는 이..
2022.08.15 -
왕건은 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나.
942년 거란은 고려에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보내왔습니다. 이건 친선의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조정에서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여겼으며 그 사신을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습니다. 이러면서 고려와 거란의 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제대로 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그 중에 거란을 지목하여 금수의 나라라 하였으며 그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군주가 어떤 특정 국가를 싫어할 수는 있으나 왕건이 남긴 훈요 십조는 후대 임금에게 지키도록 했으면 하는 약조로 10가지 약속을 남겼는데 그 10가지 중에 하나를 거란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남긴 것은 참으로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태조 왕건..
2022.08.14 -
광종의 개혁과 숙청, 효과적이었나.
고려 4대 왕으로 정종의 동생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광종입니다. 태조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은 도합 6년에 불과할 선대왕들은 치세는 불안했습니다.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두 선대왕에 대해선 병사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을 보았으니 광종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외국인우대정책을 썼ㅅ브니다. 이러한 광종의 정책에 대해 너무 지나쳤는지 당대 원로정치인 서필은 이렇게 왕에게 이렇게 간언하였습니다. “투화인(귀화인)들이 벼슬과 집을 차지하여 기존의 신하들이 살 곳을 잃었습니다. 신에게 그동안 받은 녹봉으로 작은 집을 지어 그 신하들과 나눠 살겠습니다.” 이는 광종의 지나친 외국인관료우대정책에 비꼰 말로 성격이 불같았던 광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2022.08.13 -
고려 정종의 무리수 서경천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에게는 29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29명의 부인들이 모두 왕건과 사랑을 나누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바꾸어 이야기한다면 기록상의 수치이므로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왕건은 왜 이렇게 많은 여인들과 인연을 맺어왔던 것일까요.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왕건은 혼인정책으로 인해 34명의 자녀가 두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아들이 25명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아들들은 서열에 차이가 있을 뿐, 어찌되었든 왕이 될 수 있는 명분이 있던 셈입니다. 호족입장에서는 자신의 외손자가 고려의 왕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걸 기대한 호족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혼인정책은 왕건 특유의 포용정책의 하나였..
2022.08.12 -
훈요십조는 조작되었을까.
「훈요십조」라는 것은 943년 고려 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10가지의 유훈으로 후대 왕들이 이를 토대로 지킬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고려왕조에서는 이를 토대로 왕조 내내 지켜졌을 것이라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 「훈요십조」 가운데 지금의 시각은 물론 당시의 생각으로도 이해못할 조항이 있습니다.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산과 땅은 모두 배역의 형세이며, 인심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국가에 변란이 일어나거나, 혹은 고려에 통합된 원망을 품고 국왕이 가는 길을 막아 난을 일으킬 것이다. 관청에 속한 노비와 진과 역의 잡척들은 양인이라도 관료가 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마땅하지 않다.” 이것은 「훈요십조」 8조의 내용입니다..
2022.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