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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통일의 향방을 가른 궁예, 견훤, 왕건의 리더쉽
신라 혜공왕 대에 이르러 나라는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1대 진성여왕 대에는 본격적으로 신라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라가 멸망으로 가게 된 이유에는 구체제인 골품제를 억지로 유지하려는 모습이 컸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신라가 역사 속에서 좀 더 생명력을 갖고 지탱하려면 골품제를 개혁해야만 했습니다. 6두품이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이 6관등인 아찬까지였으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6두품을 수용하였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특히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제안한 것은 그야말로 신라를 개혁할 수 있는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으나 귀족의 반발로 무산되었습니다. 또한 최치원이 활동하던 때 신라의 집권자는 진성여왕이었는데 그는 정사는 뒤로 하고 미소년과 놀러다녔고..
2022.08.10 -
궁예는 정말 폭정으로 쫓겨났을까.
신라하대는 호족이 난립하며 어지러운 시기였습니다. 그 중 힘이 센 호족은 마침내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으니 바로 궁예로 901년에 황해도 송악을 도읍으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후고구려는 900년에 견훤이 건국한 후백제와 자웅을 겨루며 사실상 저물어가는 나라 신라를 제쳐두고 이 땅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습니다. 『삼국사기』의 이야기를 통해 보면 궁예는 왕위쟁탈전에 밀려난 귀족의 자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궁예는 자신을 숨겨둔 사연을 모른 채 유모를 어머니라 여기며 살았습니다. 어느날 궁예는 자신의 출신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가 신라에 앙심을 품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이러한 궁예는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면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895년에 한산주 관내 10군현을 차지하고 황해도 지..
2022.08.09 -
처용설화에 나오는 처용은 누구인가.
서울 달 밝은 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을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향가 「처용가」 이 글은 향가 ‘처용가’입니다. 처용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신라 49대 헌강왕이 순행을 나왔다가 구름과 안개가 끼면서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안개를 걷힐 수 있는 방법을 묻습니다. 그리하여 이곳에 절을 짓자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절을 짓도록 왕이 명령하자 구름이 열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대를 개운포로 불렀습니다. 그 말에 기뻐한 동해 용은 일곱 아들과 함께 나타나 왕의 덕을 기리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헌강왕 5년,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2022.08.08 -
장보고는 왜 청해진을 설치했을까.
“청해 대사 궁복은 성이 장씨다. 일찍이 당의 서주로 건너가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을 만났고 왕은 병졸 1만을 주고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하였다.”-삼국사기- 청해진을 설치한 사람은 남북국시대의 신라 사람으로 그 유명한 장보고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라의 왕은 그에게 1만이라는 군사를 주었던 것일까요.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말타기, 수영과 활쏘기에 능했지만 신라에서는 신분이 낮아 성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에 대해 궁복 또는 궁파라고 하는 우리나라 이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당나라에 오기 전까지 그는 성이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장(張)씨가 중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성으로 삼고 복을 한자이름으로 표기하면서 보고가 된..
2022.08.07 -
과학과 예술이 결합된 걸작품 성덕대왕신종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종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되어 현존하는 종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725년에 제작된 상원사 동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보다 모양과 소리가 아름답기로 자자한 것은 771년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으로 보고 있으며 이것은 흔히 에밀레 종이라고 알려진 종입니다. 에밀레 종이라고 많이 알려진 종인 성덕대왕신종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성덕대왕의 아들 경덕왕이 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무게가 23t에 달하며 높이가 3.75m, 지름이 2m 25에 이르는 이 종은 구리 1만근을 들여 주조하기 시작했으나 실패만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경덕왕의 아들이자 성덕대왕의 손자인 혜공왕이 완성시킨 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종을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슬픈 이..
2022.08.06 -
포석정은 신라 망국의 현장인가
‘신라는 포석정에서 망하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망했다.’ 『세종실록』15년 기사 중 신라가 포석정에서 망했다는 이 기사는 신라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료가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포석정은 경주 금오산 서쪽 두메에 있는 것으로 신라의 귀족이나 상류층이 나라 생각을 하지 않고 유흥으로 지새운 망국의 현장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때는 927년이었습니다. 문경 방면을 공격하던 후백제의 견훤은 갑자기 방향을 남으로 돌려 영천을 급습하고 마침내 경주로 쇄도하였습니다. 당시 신라의 경애왕은 비빈과 종척을 거느리고 경주교외의 포석정에서 연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급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은 도망쳤으나 곧 붙잡혀서 자결을 강요당했습니다. 이후 견훤왕은 죽은 경애왕의 고종인 김부를..
2022.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