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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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에게 뺨맞은 고구려 양원왕
북위는 효문제 사후 어린 효명제를 대신해 영태후가 섭정하였습니다. 그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혔습니다. 또한 태무제 때 선비족들이 한화정책에 불만을 가져 최호와 화북의 한족들을 대부분 숙청하였지만 효문제와 풍태후 그리고 영태후는 또 한화정책을 실시하였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정책에 대한 선비족들의 불만은 523년에 일어난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북위의 상황은 고구려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구려는 북위와 공무역을 해왔습니다. 476년 이후 그 규모를 2배로 늘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북위로부터 들어온 물자는 고구려왕에 의해 귀족들에게 하사되었을 것입니다. 즉, 고구려는 북위와의 공무역을 통해 취득한 물자를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는..
2023.09.14 -
안장왕과 한씨 미녀
소설 「춘향전」은 배경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와 비슷한 이야기는 고대국가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의 안장왕과 한씨미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서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11년(529)〕 겨울 10월에 왕이 백제와 오곡(五谷)에서 싸워 이겨,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안장왕- 이 이야기는 백제본기에도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興安)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 혈성(穴城)을 쳐들어와서 빼앗았다. 〔왕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0,000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삼국사기』 『삼국사기..
2023.09.13 -
북위 황실과 인연을 맺은 고구려 여인
고구려 옆에 북위라는 나라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고구려왕은 장수왕이었습니다. 고구려인 고조의 아버지는 고양으로 고조를 비롯한 4남 3녀를 고구려에서 낳았습니다. 그러던 고조는 아버지 고양을 모시고 식구들과 함게 470년경 북위로 넘어갔습니다. 고대국가시기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었습니다. 따라서 고조 같은 고구려인이 북위로 이주해온다고 해서 딱히 막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조가 고구려에서 유력한 세력이었던 모양입니다. 북위에서 고조에게 려위장군 벼슬을 준 것입니다. 같이 따라온 고승신도 명위장군 벼슬을 받았고 노비와 소, 마 등을 북위로부터 받았습니다. 고조가 북위조정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그의 여동생이 북위의 왕 효문제와 결혼하여서 문소왕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소왕후는 아들 ..
2023.09.12 -
장수왕은 왜 평양성으로 천도했을까
장수왕은 고구려의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겼습니다. 평양 지역은 과거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王儉城)이 있던 곳이고, 고조선 멸망 후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되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곳이었습니다. 이전부터 뛰어난 경제력을 지니고 문화적으로 발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국내성 지역은 지형적으로 협소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미 동북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국으로 성장한 고구려의 도읍으로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미천왕 대에 영토를 확장하면서 고구려는 평양지역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구려에게 평양지역은 고국원왕이 백제와 싸우다가 전사한 장소이기도 하고 광개토대왕 대에는 이곳에 9개의 절을 지어 평양건설에 의지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장수..
2023.09.11 -
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난 정복활동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가 집안 지역에 세워진 것은 장수왕(長壽王) 2년(414)의 일입니다. 특히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라는 391년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대해 19세기말 일본학자들은 '도해파'의 주체를 왜(倭)로 보고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주요 근거로 삼아왔습니다. 하지만 정인보(鄭寅普), 박시형(朴時亨) 등 남북한 학계에서는 도해파의 주체를 고구려 광개토대왕으로 보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습니다. 물론 이 기사에 대해 과연 진실로 볼 것이냐하는 것도 문제로 제기될 수 있는데요. 당시 왜라는 존재가 있었고, 이들이 때때로 한반도 남부에 출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의 왜는 백제나 신라를 정복할 만한 힘이 없..
2023.09.11 -
북연황제가 된 고구려후손 고운
전연은 모용준의 아들인 모용위(慕容暐)가 왕위에 오른 뒤에 국력이 급속히 쇠락해 370년(고국원왕 40)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게 멸망했습니다. 그 뒤 모용위를 비롯한 전연의 왕족들은 전진의 도읍인 장안(長安)으로 옮겨졌으며, 모용부의 세력은 전진에 복속해 동진과의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나 383년 부견이 동진을 공격하러 나섰다가 크게 패하자 전연의 왕족들은 곳곳에서 다시 연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가 세운 후연입니다. 후연은 정령족(丁零族)이 세운 적위(翟魏)를 멸망시키고, 산둥반도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으나 모용수가 죽고 그의 아들인 모용보(慕容寶)가 즉위한 뒤에 선비 탁발부(拓跋部)가 세운 북위(北魏)에 패하면서 396년 허베이성[河北省] 일대에서 쫓겨나 도읍을 요서의 용성으..
202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