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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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은 왜 황조가를 지었을까
휘(諱) 유리(類利)·유류(儒留)·주류(朱留)라고도 불리는 유리명왕은 동명성왕(주몽)의 원자(맏아들)로 부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하였고, 그해 4월 아버지 동명성왕을 만나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후에 왕이 된 그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왕이 되어 올바른 이치로써 나라를 다스렸다는 이도흥치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유리명왕에 대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린 임금님이라고 칭송한 것인데요.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그가 나라의 시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고구려역사에서 유리명왕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리명왕 대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은 바로 도읍지를 국내성으로 옮긴 것입니다. '오락가락..
2023.08.28 -
고구려에서 신이 된 유화부인
유화부인은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주몽의 어머니로 건국 후 여신으로 추숭되고 있습니다. 유화부인의 이야기는 고구려 건국자의 어머니로 묘사되는데요. 이야기에 따르면 유화는 본래 하백의 딸인데 웅심산 아래에 있는 압록강에 놀러 나갔다가 자칭 천자의 아들이라고 하는 해모수와 통정합니다. 그 뒤 해모수는 혼자 떠나버리고 유화는 중매도 없이 통정을 했다 하여 우발수로 쫓겨났다가 동부여 왕 금와에게 발견됩니다. 금와왕의 궁실에 갇혀 있었는데 햇빛이 몸을 비추어 임신한 뒤 닷 되 크기의 알을 낳습니다. 금와왕이 알을 길가에 버리자 소와 말이 피하고, 들판에 버리자 새가 날개로 덮어주고, 쪼개려고 해도 쪼갤 수가 없어서 다시 유화에게 돌려주었는데 그 안에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주몽..
2023.08.27 -
흥미로운 이야기 고구려 건국신화
‘아들이 없어 산처에 제사를 지내던 부여왕 해부루는 어느날 공연이란 연못가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개구리‘란 뜻의 ’금와‘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여의 재상 아란불은 꿈에 천신이 나타나 동해 바닷가의 가섭원으로 옮겨 나라를 옮기라 했다며 국호를 동부여라 했다. …’ 『삼국사기』 이 후 해부루가 죽어서 금와가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부여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해모수와 정을 통한 유화 부인이 우발수라는 곳에서 울고 있자 금와가 데려와 가두었는데요. 유화부인에게 햇빛이 비추고 얼마 뒤 큰 알을 낳았습니다. 이 알은 돼지도 피하고 들판에 버렸을 때는 새들이 날아와 보호해주니 이 알속에서 나온 사내아이가 나이 일곱 살이 되어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
2023.08.26 -
고구려의 결혼풍습 데릴사위제
‘고구려의 혼인 풍습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한 후에야 신라의 집으로 돌아온다.’ 『후한서』「동이열전」 ‘고구려의 혼인풍습은 혼인하기 전에 말로써 미리 신랑 신부를 정하면,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사위집이라고 부른다. 날이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절하면서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거듭 요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 때서야 사위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사위집 곁에 쌓아둔다. 그 후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본집으로 돌아온다.’ 『삼국지』 이렇듯 고구려에서는 처가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혼인제도가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2023.07.27 -
400년 고구려는 왜 한반도 남정을 했을까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부터 신라성(新羅城)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그래서 라인(羅人)을 수병(戍兵)으로 두셨다.…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
2023.07.21 -
덕흥리 고분 유주 자사 진의 출신은 어디인가.
덕흥리(德興里) 벽화무덤은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 구역 덕흥동 무학산 옥녀봉 남단 구릉에 자리잡은 고구려의 흙무지돌방무덤으로 지난 1976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무덤에는 무사도와 견우와 직녀 설화, 그리고 불교의 도입을 엿볼 수 있어 고구려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사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고분벽화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무사들의 모습이 있어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상무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여인들이 나들이를 그린 그림에서는 주름치마와 햇볕가리개까지 묘사돼 상류층 부인들의 호사스런 생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408년이라고 하는 연대도 쓰여져 있으니 이는 학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꽃그림은 망자에 대한 불교의 내세관을 표현한 것인데 고..
2023.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