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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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속의 고구려 제나라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당나라에 의해 많은 고구려인들이 만주의 서쪽에 있는 영주라는 곳으로 강제이주당합니다. 당시 이 곳에 끌려온 고구려인들은 약 20만 명, 그리고 이 곳에서 당나라에 나라를 세우는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정기로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전에 중국 산둥반도에 제나라를 세우고 당나라를 위협했던 고구려인의 후손입니다. 사실 이정기에 대한 출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강제이주당한 고구려인의 후손일 것이라는 것은 일종의 추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명이 회옥인 그는 732년에 태어났으며 당나라 안에서 안녹산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주에 주둔하고 있던 평로군의 장수로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안녹산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당나라 조정..
2023.01.18 -
국제교류를 위한 승부수 장수왕의 남진정책
장수왕이 고구려의 왕으로 있던 시절, 대륙은 이민족의 화북과 한족(漢族)의 화남을 차지하며 남북조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아직 통일이 되지 않았던 만큼 외교전쟁은 더욱 치열했는데 장수왕은 413년에 동진으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고 이에 동진은 장수왕에게 작호를 내립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의 강대국였던 지라 송나라에서 작호를 내려 안심시켰습니다. 한편 425년에는 북위로부터 화친동맹을 맺어 작호를 받았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북위의 황제에게 북위황제의 한자를 물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왕조에서는 천자와 그 조상들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문서에 쓰는 것을 관례로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러한 글자를 알고 싶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위를 천자국으로 받들겠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복속의 의미가 아니었습니..
2022.11.25 -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은 어디까지였나.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고구려는 위기였습니다. 모용황이 서기 339년 고구려 서북방의 중요 거점인 신성(新城)을 공격한데 이어 342년에 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가는가 하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갔다가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고국원왕이 서기 371년 평양까지 치고 올라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고구려는 그야말로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이 죽은 지 4년 뒤인 서기 375년을 시작으로 376년, 377년 그렇게 해마다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다분히 부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어렸을 적부터 보고 자란 태자 담덕은 백제는 정복해야 할 나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2022.11.23 -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유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졸본성입니다. 지금의 환인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주몽이 건너와 소서노 세력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곳이니 이 곳은 본래 소서노의 근거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도읍한 오녀산성은 산정상에 있는 산성이고 주몽과 소서노는 이 곳에서 6칸 정도의 건물을 짓고 살았습니다. 이 곳은 방어용인 산성으로 피난처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절벽 위에 지어져 남북 1km 동서 300m의 규모의 성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세트를 이루는 평지성으로 하고성자성지가 있습니다. 동벽 226m, 서벽 264m, 남벽 212m, 북벽 237m인 이 하고성자성지를 오녀산성과 세트를 이루는 성으로 보이는 이유는 여기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오녀산성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1.5km 떨어진 곳..
2022.11.20 -
부여건국설화와 고구려건국설화는 왜 닮았을까.
우리는 부여란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나라 고대국가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출도’라고 하는 정치체제가 특징인 나라로 알고 있는데 왕을 중심으로 마가, 우가, 저가, 구가를 우두머리로 하는 세력들이 모인 연맹왕국이라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대사(大使)·사자(使者) 등의 지배층과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피지배 계급으로 나뉘어 생활한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과정에서 부여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부여라는 단어는 백제의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는 데서 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부여’란 단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이라는 ..
2022.11.13 -
안시성 싸움, 어떻게 싸웠나.
수나라가 패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잠시 평화시기가 있었습니다. 건국 초기의 당나라는 안정이 필요했고 당을 세운 고조 이연도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 실패를 교훈 삼아 고구려 정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이 두 나라는 여수전쟁간의 생긴 포로를 맞교환하는 평화적인 제스처를 서로 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태종이 즉위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당태종은 이세민,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현무문의 변’, 이렇게 왕조 국가로서는 썩 순조로운 계승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오른 당태종은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황제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정관의 치’라고 하는 업적으로 개인적인 마음을..
2022.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