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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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은 누구의 무덤인가
1949년 북한 황해도 안악군에서 안악3호분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안악 3호분 속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덤의 주인과 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 부엌과 우물, 도축실, 외양간, 마차를 넣어두던 차고와 도끼를 들고 있는 무사, 수박희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병과 보병, 악사들의 행렬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벽화의 부엌에서는 부뚜막 위에 큰 시루를 얹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떡을 찌고 있어 당시의 생생함을 전달하고 있는데요. 벽화에는 서역인들도 표현되어 있으며 당시 활발했던 고구려의 대외교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 관심이 쏠렸고 현재도 정확도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추측이 오고 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무덤에 ..
2022.06.28 -
두 명의 고구려왕과 결혼한 우씨 왕후, 형사취수제 때문?
고대와 현대 사이에는 결혼식 문화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고구려에서는 형사취수제라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형이 죽으면 형의 아내를 동생이 취하는 제도로 지금은 가정조차 할 수 없는 제도입니다만 고대 국가 시기에는 남자가 전쟁에 나가 죽거나 돌연 사망하는 일이 많았고 따라서 여자가 과부가 될 경우 노동력 이탈로 이어질 수 있었고 노동력이 중요했던 농업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가임기 여성을 과부로 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큰 손실이었기에 이런 제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에서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는 예비적인 배우자의 관계 내지는 잠재적인 미래의 부부관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성적인 면에서는 유보된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2022.06.25 -
낙랑공주는 왜 자명고를 찢어야 했을까.
한국 고대사의 비극적인 남녀사랑이야기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아들로 대무신왕은 그를 무척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대무신왕 15년에 호동왕자는 옥저(沃沮)를 유람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낙랑의 왕 최리를 만나게 됩니다. 낙랑의 왕 최리는 호동왕자에게 비범함을 느꼈는지 아니면 고구려와 동맹을 의식해서였는지 그를 데리고 가서 사위로 삼습니다. 그리고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낙랑국에 두고 혼자 고구려로 돌아옵니다. 그런 호동왕자는 낙랑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 최씨녀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런 말을 전합니다.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나팔을 몰래 찢어버린다면 내가 그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2022.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