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구한말(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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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역사현장 덕수궁
덕수궁은 본래 경운궁이라는 이름이었으며 조선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집이었습니다. 개인의 집이 궁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592년, 임진왜란이란 큰 난리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떠나 전쟁터였던 조선의 피해는 워낙에 컸고 당시 임금 선조가 한양에 돌아왔을 때에는 머물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머문 곳이 바로 덕수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리가 협소했으므로 선조는 주변 왕족과 고위관리들의 집을 궁으로 편입시켰고 이때부터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때 경운궁은 ‘경사스러운 기운이 모여 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615년..
2023.04.19 -
신미양요와 어재연장군의 수자기
지난 2021년 6월, 미국에서 하나의 깃발이 우리나라에 도착했습니다. 장수를 뜻하는 한자 ‘帥’가 쓰인 깃발로 가로 4.13m, 세로 4.30m의 큰 크기에 삼베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1871년 6월 10일 한강 어귀인 강화도에서 조선과 미국이 전투를 벌인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미국은 당시 전투에서 해당 기를 가져갔습니다. 당시 조선은 태극기 같은 국기가 없었으므로 이 장군기가 국경을 지키는 군대와 군사령관 본진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의 군대는 이러한 기를 걸고 싸웠고 이순신도 그러했습니다. 당시 광성보 전투에 참여한 윈필드 슐리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
2023.04.18 -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선과 미국에겐 거중조정이란.
1882년 조선은 처음으로 서양과 수교를 맺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조선을 대표해서 신헌과 김홍집이 앉았고 미국 측에서는 해군제독 출신인 슈펠츠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청의 외교관인 마건충이 통역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이중통역을 통하여 조약의 첫 번째에는 상대국이 어려움을 당하면 반드시 서로 돕는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가 중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을 노리고 있던 주변국이 있었으니 그것은 러시아와 일본이었습니다. 만약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할 경우 이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북진할 수 있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사실 조선과 미국의 인연은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전에 신미양요가 ..
2023.03.18 -
사라진 고종의 돈 그리고 헐버트
1895년 조선은 을미사변을 겪었고 다음 해 2월에는 아관파천이 있었습니다. 암울한 조선의 현실, 이후 고종은 결단을 내립니다.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서 조선은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중국과 대등한 자격을 갖춘 황제국임을 대내외에 알린 것입니다. 그리고 고종은 그동안 조선의 왕들이 입던 붉은 색 곤룡포 대신 황색의 곤룡포를 입습니다. 그러면서 고종 스스로도 과인이라 부르지 않고 짐이라 부릅니다. 고종 스스로 국격을 상승시킨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구본신참에 입각하여 광무개혁을 단행합니다. 그리고 환구단에서 대한제국황제즉위식을 거행합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형의 공간으로 조선은 토지신과 곡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종은 환구단을 설치하고 ..
2023.03.17 -
고종 뒤의 권력자 명성왕후
고종은 1863년 왕위에 올랐으니 당시그의 나이 12세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아직 미혼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철종의 3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1866년에 되어서야 혼례를 올립니다. 그렇게 정한 고종의 배필이 바로 명성왕후입니다. 명성왕후의 아버지는 민치록이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손이었습니다. 조선후기의 명문가였으나 민치록 대에는 이전의 위상보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되도록 한미한 가문출신의 며느리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1866년 고종이 명성왕후와 결혼을 하게 되니 당시 나의 16세였습니다. 사실 명성왕후의 집안이 흥선대원군이 한미하다고 판단할 만큼 그 정도로 보잘 것 없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여흥 민씨는 태종 이방원의 부인 원..
2023.03.16 -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왜 사이가 좋지 못했나.
우리가 흥선대원군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쇄국정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그가 세운 척화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쇄국정책이란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갑오개혁 이후에나 사용된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을 설명하면서 쇄국정책이란 말이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정책을 설명할 단어로 당시의 상황에서 찾는다면 해금정책이란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해금이란 바다를 통한 왕래와 교역을 금지한다는 것으로 사실 이것도 주로 중국왕조에서 사용하던 대외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조선왕조에서도 적용되었는데 중국 상선도 조선에 배를 타고 와서 무역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서양 배들이 와서 하는 통상요구는 받아들여질 리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2023.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