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남북국(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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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
‘우리나라가 중국과 통하기는 멀리 단군·기자부터이지만 문헌이 없어져 자세히 알 수 없다. 수·당 이래로는 이를 간책에서 고구할 수는 있지만 대개는 적막하여 부족하다. 당의 대어사 최치원에 이르러 문체가 크게 갖추어져 마침내 동방문학의 조가 되었다.’17세기 비평가 홍만종 후대에 최치원은 우리나라 문학의 조종으로 평가받을 만큼 그는 우리 문학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하여 관직을 받은 신라인이자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문학인들과 교류를 한 사람으로 말년에는 신라로 돌아와 보내기도 했습니다. 최치원의 자는 고운 혹은 해운이며 서기 857년에 경주에서 태어나 12세가 되는 868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습니다. 당시 나당의 외교형태로는 왕족을 인질로 보내어 당의 조..
2022.12.10 -
신라 금성에 백만 명이 살았을까.
신라의 수도는 경주였습니다. 그로 인해 현재 경주에는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첨성대을 비롯한 왕릉급 무덤등 각종 유적이 위치한 경주는 그야말로 역사박물관이란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신라의 도읍지로서의 경주의 모습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주를 왕경이라 불렀습니다. 임금이 거주하는 수도란 뜻으로 조선왕조실록에도 한양을 그리고 고려사에서는 개경을 그리 불렀으므로 왕경은 당시 수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신라가 991년 동안 지속되는 동안 경주는 왕경으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1000년이 가까운 왕조 역사도 흔치 않은 일인데 그러는 동안 왕경이 바뀌지 않고 계속 유지되었던 것도 흔하지 않습니다. “신라 전성기에 ..
2022.11.06 -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린 이유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나서 이후의 우리나라시대를 한동안 통일신라시대라 불렀으나 지금은 남북국시대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 위에는 발해란 나라가 있고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발해는 지금의 북한과 중국, 러시아에 걸쳐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발해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발해의 역사를 잊지 않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1994년 대중음악가 서태지는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3번째 앨범을 내면서 타이틀 곡으로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를 수록하였습니다. 큰 인기를 끌었던 이 노래는 왜 제목에 ‘발해’란 우리나라 고대국가를 넣었을까 궁금할 수 있습니다. 아마 고..
2022.11.05 -
후삼국 통일의 향방을 가른 궁예, 견훤, 왕건의 리더쉽
신라 혜공왕 대에 이르러 나라는 어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1대 진성여왕 대에는 본격적으로 신라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라가 멸망으로 가게 된 이유에는 구체제인 골품제를 억지로 유지하려는 모습이 컸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신라가 역사 속에서 좀 더 생명력을 갖고 지탱하려면 골품제를 개혁해야만 했습니다. 6두품이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이 6관등인 아찬까지였으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6두품을 수용하였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특히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제안한 것은 그야말로 신라를 개혁할 수 있는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으나 귀족의 반발로 무산되었습니다. 또한 최치원이 활동하던 때 신라의 집권자는 진성여왕이었는데 그는 정사는 뒤로 하고 미소년과 놀러다녔고..
2022.08.10 -
궁예는 정말 폭정으로 쫓겨났을까.
신라하대는 호족이 난립하며 어지러운 시기였습니다. 그 중 힘이 센 호족은 마침내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으니 바로 궁예로 901년에 황해도 송악을 도읍으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후고구려는 900년에 견훤이 건국한 후백제와 자웅을 겨루며 사실상 저물어가는 나라 신라를 제쳐두고 이 땅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습니다. 『삼국사기』의 이야기를 통해 보면 궁예는 왕위쟁탈전에 밀려난 귀족의 자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궁예는 자신을 숨겨둔 사연을 모른 채 유모를 어머니라 여기며 살았습니다. 어느날 궁예는 자신의 출신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가 신라에 앙심을 품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이러한 궁예는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면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895년에 한산주 관내 10군현을 차지하고 황해도 지..
2022.08.09 -
처용설화에 나오는 처용은 누구인가.
서울 달 밝은 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을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향가 「처용가」 이 글은 향가 ‘처용가’입니다. 처용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신라 49대 헌강왕이 순행을 나왔다가 구름과 안개가 끼면서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안개를 걷힐 수 있는 방법을 묻습니다. 그리하여 이곳에 절을 짓자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절을 짓도록 왕이 명령하자 구름이 열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대를 개운포로 불렀습니다. 그 말에 기뻐한 동해 용은 일곱 아들과 함께 나타나 왕의 덕을 기리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헌강왕 5년,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2022.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