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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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 져버린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
‘대사헌께서 벼슬을 한지 3년인데 세상 풍기가 많이 변했습니다. 청탁하는 것, 뇌물 주는 관행이 끊어졌으니 대감을 노리는 자들이 많을 겁니다.’ 이 대감은 바로 조광조입니다. 벽초 홍명희가 쓴 소설 『임꺽정』의 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 이후 조광조는 유배를 갑니다. 이에 선비들이 반발합니다. 당시 조광조는 개혁의 아이콘으로 여겨졌으므로 당시 조광조의 유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조광조가 개혁정치의 핵심으로 생각한 것은 언로통색론(말길이 통하면 흥하고 막히면 망한다.), 즉 언로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벼슬직에 나아가 처음 맡았던 자리는 언관의 자리로 이 자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벼슬직에 처음 나아가 맡았던 자리이니만큼 임금에게 간언하는 벼슬이 형식상 자리로 보일 수 있..
2023.01.03 -
임꺽정은 왜 도적이 되었나.
유명한 도적이 있었다는 것은 해당 시기가 평안하지 않은 시대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부정부패가 심했다는 것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중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가 고향으로 어떠한 과정으로 도둑이 되었는지는 잘 알려진 바 없습니다. 다만 위와 같이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먹고 살기 힘든 현실적인 문제가 부딪혀 도적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그에 대해서 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임꺽정은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교활한 면이 있는 인물이라 했으며 그와 함께한 도둑들도 모두 민첩하고 잔인했다고 합니다. 사서의 기록이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실록에 대한 그의 첫 기록은 바로 성의 포도군관 이억근이 임꺽정을 추..
2023.01.02 -
처절한 정유재란 현장 도산성 전투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되면서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의 재침으로 이루어진 전쟁이었습니다. 1597년 8월에 시작된 전쟁은 이듬해 12월까지 지속되었으며 일본은 임진왜란에 있었던 과정을 교훈 삼아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고 한양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의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보급로를 탄탄히 하기 위해 실행된 전라도 공략에 성공한 일본은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일본군은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명량해전에서 대패하고 보급로의 단절을 우려한 일본군은 직산전투에서도 패하며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군은 한반도 남해안에 성을 쌓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명연합군이 이렇게 쌓여진 왜성을 전쟁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시..
2023.01.01 -
임진왜란의 생생한 기록 임진왜정도
옛날 전투의 경우는 사진이 발명되지 않았을 만큼 그 모습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으며 유물이나 유적으로 가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생생한 전쟁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물론 임진왜란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있으나 이것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당시의 모습을 찰나에 포착하여 담은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정도」만은 당시 종군화가가 참여하여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따라서 이 「임진왜정도」를 통해 당시의 생생한 전쟁의 모습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임진왜정도」의 배경은 전라남도 순천시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임진왜정도」는 원본을 촬영한 11장의 사진으로 당시 순천을 중심으로 한..
2022.12.31 -
백성들이 뭉쳐 이루어낸 승리 진주대첩
임진왜란의 많은 전투 중에 우리에게 빛나는 전투 중에 하나가 바로 진주대첩입니다. 일본군 정예병 3만을 상대한 조선군은 3천 8백 여명에 불과했고 아군은 관군과 백성들을 합친 숫자였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승리는 일본을 여러모로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단 이 전투는 임진왜란을 진행한 일본군에게 있어 처음으로 겪는 대참패였고 전쟁을 계획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목소(木曾)의 목을 베어오라`고 명령했는데 목소는 목사를 뜻하는 말로 바로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진주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했고, 전라도는 일본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분함을 느꼈던 일본은 8개월이 지난 1593년 다시 7만에 다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
2022.12.30 -
12척의 배를 이끌고 승리, 명량대첩
우리나라 전쟁 역사상 가장 빛나는 전투 중 하나가 바로 명량해전입니다. 13척의 배만으로 133척의 왜선을 무찌른 기적같은 승리, 전투를 이끈 이순신조차도 천행(天幸)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천행(天幸)에만 맡겨질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조선군이 이길만한 요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벌어진 임진왜란, 여기서 일본의 예상치 못한 조선 수군의 해안권 장악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렸습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을 배제한 채 명나라와 협상을 벌였으나 곧 결렬되고 이는 재침으로 이어지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조선조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균으로 하여금 일본의 수군을 격파하라고 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를 당하며 150여 척의..
2022.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