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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의 불교수용
고구려의 17대왕은 소수림왕입니다. 태자 시절의 이름은 구부(丘夫)로 추정되며 고국원왕의 뒤를 이었습니다. 이전 왕인 고국원왕은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전연의 침략을 겪었고 백제와 전투를 하다가 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소수림왕 이후로 왕위를 이은 군주 중에 광개토대왕이 있으니 소수림왕은 이후의 전성기를 활짝 열 수 있도록 주춧돌 역할을 한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소수림왕은 부왕의 팽창정책 실패로 인한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해 일련의 체제 정비에 나섰습니다. 불교를 수용하고 보급하기 위해 전진의 승려 순도와 아도를 맞아들였고, 유교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해 유교이념의 확대를 꾀했습니다. 또한 국가 통치의 기본법인 율령을 반포하여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에 나섰습니다. 이러..
2023.09.09 -
고국원왕
고국원왕(故國原王, ?~371)은 고구려 제1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31년~371년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천왕으로 미천왕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였습니다. 미천왕 시기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은 미천왕 대는 중국 진(晉)이 붕괴하고 5호 16국의 혼란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미천왕 대에는 요동지역으로 진출을 꾀하였고 이 과정에서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전연(前燕)과 크게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고국원왕 대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따라서 고국원왕 시기 중국 대륙 쪽에서는 모용선비가 고구려에게 가장 큰 적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미천왕 말기에는 모용선비를 견제하기 위해 후조의 왕인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어 큰 활을 선물하였습니..
2023.09.08 -
진실없는 논쟁의 숫자 기원전 2333년
한국사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란 노래를 익히 알려져 있는데요. 이 노래 처음 등장하는 위인은 바로 단군입니다. 1절부터 5절까지 다 외우지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로 시작하는 노래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군에 대해 실존했는지 의문이 따르기도 합니다. 일단 단군이라고 하면 단군신화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신화는 한 나라 혹은 한 민족으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예로부터 섬기는 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뜻하는데요. 신 자체가 진실을 규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신화의 주인공으로 인식되는 단군도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화들이 사람들이 즐기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이냐 하면 꼭 그렇..
2023.09.07 -
소금장수가 고구려왕이 될 수 있던 이유
고구려의 13대 왕은 서천왕이었습니다. 서천왕은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여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서천왕은 자신의 동생을 제거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동생들은 일우와 소발이었는데요. 형제 소발과 일우는 병을 핑계삼아 부하들과 함께 온천으로 가서는 그 곳에서 연회를 베푸는 한편 무리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반계획은 서천왕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천왕은 재상 벼슬을 내린다고 두 사람을 속여 불렀으니 궁으로 들어갔다가 서천왕이 숨겨두었던 장사들에게 잡혀 죽게 되었습니다. 292년 서천왕이 죽자, 상부가 왕위를 계승하여 고구려 14대 봉상왕이 되었습니다. 서천왕과는 달리 봉상왕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습니다. 봉상왕의 유년 시절에 대해 어려서부터 ..
2023.09.06 -
중천왕이 장발미녀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린 이유
중천왕은 고구려 제12대 왕(재위 248∼270)으로 . 휘(諱) 연불(然弗:延弗), 동천왕(東川王)의 맏아들입니다. 고구려에서는 12대 중천왕(재위 248~270)이 즉위하며 역모에 연루된 중천왕의 친동생 예물과 사구를 참수했습니다. 고구려는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의 다섯 부족이 연합으로 국가를 통치했는데 중천왕이 연노부 출신 연씨를 왕비로 책봉했습니다. 중천왕 친동생 둘이 왕비 책봉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급기야 소수 부족 비류나족과 합세해 모반을 획책하자 처형한 것입니다. 중천왕은 외모가 준수하고 지혜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연나부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 들였습니다. 특히 당시 국상의 자리는 명림어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혼인은 연나부를 의식한 것이라 볼..
2023.09.05 -
을파소가 진대법을 건의했을까
진대법(賑貸法)은 194년 고구려에서 실시된 구휼 제도입니다. 흉년기나, 춘궁기에 국가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양곡을 대여해 주고 수확기인 10월 즈음에 낮은 이자를 쳐 갚게 한(춘대추납) 제도로,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제도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빈민구제법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 제도는 식구가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 있게 빌려준 제도였습니다. 진대법을 실시할 때의 왕은 고국천왕입니다. ‘12년(190) 가을 9월에 경도(京都)에 눈이 6척이나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인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 평자(評者)인 좌가려(左可慮) 등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권세를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였으며, 남의 자녀를 노략질하고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나라 사..
2023.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