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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싸움의 신 고구려 대무신왕
대무신왕은 고구려 3대 임금(재위18~44)으로,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추모왕(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의 업적을 이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紹承基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도절태자로 기원전 6년에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인질 교환을 요구할 때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했으나 도절이 이를 거부하여 끝내 부여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대소왕이 같은 해 겨울에 5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심한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패배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기 1년 1월에 죽었는데 사인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리왕의 둘째는 해명태자로 장남이자 태자였던 도절이 죽은 뒤, 서기 ..
2023.08.29 -
유리왕은 왜 황조가를 지었을까
휘(諱) 유리(類利)·유류(儒留)·주류(朱留)라고도 불리는 유리명왕은 동명성왕(주몽)의 원자(맏아들)로 부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하였고, 그해 4월 아버지 동명성왕을 만나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후에 왕이 된 그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왕이 되어 올바른 이치로써 나라를 다스렸다는 이도흥치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유리명왕에 대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린 임금님이라고 칭송한 것인데요.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그가 나라의 시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고구려역사에서 유리명왕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유리명왕 대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은 바로 도읍지를 국내성으로 옮긴 것입니다. '오락가락..
2023.08.28 -
고구려에서 신이 된 유화부인
유화부인은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주몽의 어머니로 건국 후 여신으로 추숭되고 있습니다. 유화부인의 이야기는 고구려 건국자의 어머니로 묘사되는데요. 이야기에 따르면 유화는 본래 하백의 딸인데 웅심산 아래에 있는 압록강에 놀러 나갔다가 자칭 천자의 아들이라고 하는 해모수와 통정합니다. 그 뒤 해모수는 혼자 떠나버리고 유화는 중매도 없이 통정을 했다 하여 우발수로 쫓겨났다가 동부여 왕 금와에게 발견됩니다. 금와왕의 궁실에 갇혀 있었는데 햇빛이 몸을 비추어 임신한 뒤 닷 되 크기의 알을 낳습니다. 금와왕이 알을 길가에 버리자 소와 말이 피하고, 들판에 버리자 새가 날개로 덮어주고, 쪼개려고 해도 쪼갤 수가 없어서 다시 유화에게 돌려주었는데 그 안에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주몽..
2023.08.27 -
흥미로운 이야기 고구려 건국신화
‘아들이 없어 산처에 제사를 지내던 부여왕 해부루는 어느날 공연이란 연못가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개구리‘란 뜻의 ’금와‘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여의 재상 아란불은 꿈에 천신이 나타나 동해 바닷가의 가섭원으로 옮겨 나라를 옮기라 했다며 국호를 동부여라 했다. …’ 『삼국사기』 이 후 해부루가 죽어서 금와가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부여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해모수와 정을 통한 유화 부인이 우발수라는 곳에서 울고 있자 금와가 데려와 가두었는데요. 유화부인에게 햇빛이 비추고 얼마 뒤 큰 알을 낳았습니다. 이 알은 돼지도 피하고 들판에 버렸을 때는 새들이 날아와 보호해주니 이 알속에서 나온 사내아이가 나이 일곱 살이 되어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
2023.08.26 -
백제유민출신 당장수 사타충의
사타충의는 백제 유민출신의 당나라 장군으로 출자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돌궐의 사타(沙陀) 계열이 아닌가 의심받았습니다. 하지만 《문원영화》에서 그의 출신을 삼한구족(三韓舊族), 즉 한국계 유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어 백제 대성팔족의 사씨(沙) 가문 출신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택씨는 백제의 명문귀족으로 특히 사비부여시기에는 8대 귀족 가문 중에서도 첫째 가는 집안이었습니다. 당으로 간 백제 유민이나 고구려 유민이 다 그렇듯 사타충의의 출생연도는 불확실합니다. 다만 당으로 이주한 사택 씨중에는 사타상여와 사타천복이 있으며 사타충의는 7세기말에서 8세기 초에 요직에 있어 전쟁을 수행하니 그가 20세를 전후하여 백제의 멸망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백제 유민으로서 당나라에서도 활약한 것은 아마..
2023.08.25 -
백제 부흥운동 (2)
백제부흥운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군량미와 물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화되면서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도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주류성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하여 왜국과의 통교에는 유리했지만 농토와는 멀어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제부흥운동군은 근거지를 주류성에서 피성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도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인 주류성의 위치 비정은 그야말로 제각각인데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며 충남 홍성군의 학성산성설이 있는 반면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설, 연기군 전의면의 당산성설 또 전라북도에서는 정읍시의 두승산성설과 부안군 상..
2023.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