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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발전에 힘쓴 군주 세종
세종 즉위 3년에 조선은 극심한 가뭄으로 굶어 죽는 백성들이 허다했습니다. 세종은 급기야 신하들에게 경회루 옆에 낡은 재목으로 초가집을 지으라 명령합니다. 세종은 처소인 강녕전을 놔두고, 그곳에서 정무를 살피기 시작합니다. 세종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만류하는 신하와 소헌왕후의 눈물 어린 호소도 뿌리친 채 "백성들이 굶어서 죽어 나가는데 임금이 어찌 구들장을 지고 편한 잠을 잘 수가 있느냐"라며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런 생활은 무려 2년 4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종의 모습은 어려운 시기에 백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의지를 몸소 보인 것으로 정책이나 업적에서도 백성을 생각했던 세종대왕의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세종은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하고 달력을 만든 것입니다. ..
2024.01.16 -
중국에서 존경받는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
기림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삼국시대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그리고 기림사는 한국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증명한다는 것인데 인도의 정토 불교가 해양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됐고, 자연스럽게 부처님에게 공양하던 차가 유입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학계는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부인해왔으므로 이와 관련하여 기림사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은 그 가장 큰 요인이 우리의 역사가 중국 중심의 역사, 즉 사대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기림사는 인도에서 오신 광유성인께서 임정사를 창건하시고 이 후 643년 선덕여왕 12년에 원효스님께서 기림이라는 이름으로 개창하였다고 합니다. 기림사는 2000년 전 바닷길을 통한 정토불교의 유입과 함께 '급수봉다', 즉 ..
2024.01.13 -
세도 정치 속에서 한 줄기 빛 효명 세자
정조가 승하한 조선은 순조가 즉위하면서 세도 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유력한 가문이 정치를 주도하였고 은 국정의 혼란과 민생의 파탄을 가져왔습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도정치를 억제하려 했고 왕정의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21세의 이른 나이로 훙서(薨逝- 왕이나 왕족의 죽음)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인물입니다. 효명 세자는 22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지만,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습니다. 세자는 [경헌시초(敬軒詩抄)], [학석집(鶴石集)], [담여헌시집(談如軒詩集)], [경헌집(敬軒集)] 등의 여러 문집을 남겼습니다. 거기에는 시조(9수)와 ‘목멱산(木覓山)’, ‘한강(漢江)’, ‘춘당대(春塘臺)’ 등의 국문..
2024.01.09 -
백제 불국토를 꿈꾼 창왕
1430년 전인 577년. 백제 위덕왕(554-598)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 목탑터에서 황금 사리병이 발굴되었습니다. '정유년이월십오일백제왕창(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백제 창왕 재위기간 중 정유년은 577년입니다. 사리함 몸체에는 다음과 같이 5자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말은 아래와 같습니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
2024.01.06 -
관산성 패배 뒤에 왕위에 오른 창왕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사적 제427호 '부여 왕흥사'는 백제의 대표적인 왕실 사찰입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목탑 터에서 발견한 '왕흥사지 사리기(보물 제1767호)'에서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정유년(577년) 2월 15일에 절을 창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리기를 통해 절의 발원자와 창건 연도, 창건 배경 등을 확인, 백제史 연구의 전환점이 되는 등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창왕은 백제 왕으로서 집권한 기간은 45년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미비합니다. 그에 대한 기록으로는 성왕의 맏아들이었다는 것과 죽은 뒤 위덕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것으로 『삼국사기』에 나와 있습니다. 창왕에 대한 기록을 해외에서 찾자면 『일본서기』에서 확..
2024.01.03 -
정복군주 고구려 태조왕의 반격
고구려 6대 왕은 태조왕이었습니다. 이름은 ‘궁’이요 어릴 때 이름은 어수였습니다.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자 어머니는 부여인입니다. 태조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7세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전 모본왕은 즉위하자마자 왕자 익을 왕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모본왕의 태자가 자질이 부족하다하여 태조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위계승을 하던 가문이 재사의 후손 쪽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왕위에 오르니 나이가 어려 그의 어머니인 부여태후가 수렴청정을 맡습니다. 태조대왕은 고구려의 정복군주 중 한 명입니다. 고구려 주변에는 북쪽에 부여, 서쪽에 후한, 남쪽에 후한의 낙랑군, 북동쪽에 숙신이 있었습니다. 태조왕 대에 요서를 공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부여태후가 섭정할 때의 일입니다. 태조왕은..
2023.11.17